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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길을 밝히다(독서)

【미움받을 용기 】네 번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by 공자 (공영효) 2022. 5. 14.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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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순서대로 생각해보게.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기에 속해 있네. 공동체 안에서 내 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느끼는 것. 즉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네. 이를테면 학업, 일, 친구, 그리고 연애와 결혼도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여겨지는 장소와 관계를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그렇지 않나?

[청년: 아, 그럼요.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철학자: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지.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면서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란 말이야.

[청년: 전체의 일부라고요?

[철학자: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해.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며 내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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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그래서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되지. 그리고 분개하네. "저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 "저 사람은 내 기대를 배신했어" ,  "저 사람은 이제 친구가 아닌 적이야"하고 말이야.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머지 않아 '친구'를 잃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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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지구의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될까? 지구의라면 프랑스를 중심으로 볼 수 도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볼 수도 있다네. 브라질을 중심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모든 장소가 중심이면서 또 중심이 아니지.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중심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네. 지구의란 그런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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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우리가 처음에 했던 얘기로 돌아가 보세.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해.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보았네.

[청년: 적극적으로 공헌한다? 그게 무슨 뜻이죠? 

[철학자: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람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 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무엇을 해 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commit)하는 길일세.

[청년: 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철학자: 그래.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걸일세.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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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과제의 분리에 대해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게. 아이가 공부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지, 부모와 교사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네. 개입이란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들어 "공부해"라고 하거나 "그 대학에 가야 해"하고 지시하는 걸 뜻하네.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 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청년: 돕는 것은 강제가 아니란 말이군요?

[철학자: 그래.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야. 그야말로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일이지. 과제를 하는 것도 본인이고, 과제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도 본인이지.

[청년: 칭찬하지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다.

[철학자: 그래,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철학자: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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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만약 자네가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이지.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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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청년: 남에게 '좋다'는 평가를 받아도 공헌했다고 느끼지 않나요?

[철학자: 자네 말대로야. 이는 앞으로 우리가 할 논의와도 관계가 있는 내용인데. 아들러 심리학에서 '공헌'이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일세.

[청년: 어떤 점에서요?

[철학자: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아들러의 견해는 다음가 같지.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철학자: 열등감에 관해 설명할 때,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의 문제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가치가 있다'라고 느끼느냐,  '나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느냐. 만약 '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될 걸세.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하는 점이라네.

[청년: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그 점을 명확히 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철학자: 매우 간단하네.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답이지.

[청년: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철학자: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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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사랑에서도,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도 나이는 관계없네. 교우의 과제에 일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세. 교우의 과제에 일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세. 나와의 관계에서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면 된다네. 밀착될 정도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고, 손을 뻗으면 서로의 얼굴에 닿는 정도의 거리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