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도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 별은 이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절대적인 이상향이라네"
자기 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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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청년] : .....바꿀 수 있는 것가 바꿀 수 없는 것.
[철학자] : 그래.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청년] : 음 . 그러고 보니 전에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라는 작가가 이와 비슷한 말을 인용했더라고요. "신이여, 바라옵건데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요. [제5 도살장(Slaughterhous-Five)]이라는 소설이었어요.
[철학자] : 그래, 자네도 알고 있군. 기독교계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니버의 기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지.
[철학자] : 그래 ,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젊은 사람은 어른보다 앞서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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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편의상 지금까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 →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자네, 며칠 전에 적은 메모를 가지고 있나?
[청년] : 아. 아들러 심리학이 제시한 목표에 관한 메모요? 그날 이후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여기요.
- 행동 목표 :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 위의 행동을 뒷바침 하는 심리적 목표 :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
[철학자] : 이 메모를 방금 전에 한 얘기와 연관시켜 생각하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즉 각 ①항은 '자립할 것'과 '내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은 자기수용에 관한 얘기네. 반면 ②항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과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은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으로 연결되지.
[청년] : ...그렇군요. 인생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이 내용들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어요.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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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청년] : 방금 말했던 타자공헌이군요?
[철학자] : 그래.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경우의 타자공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점이지.
[청년] : 눈에 보이는 공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요?
[철학자] : 자네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네. 그런 타인의 과제이지 자네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로 공헌을 했는지 아닌지는 원칙적으로 알 수도 없고, 즉 타인에게 공헌할 때 우리는, 설사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한 걸세.
[청년] : 잠깐만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이란.......
[철학자] : 이미 자네도 눈치 채지 않았나? 바로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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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하지만 이제 인간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네. 인간은 자신을 좋아하고 싶다. 자신이 가치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헌감을 원한다. 그리고 공헌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원하는 거지.
[청년] : 인정욕구가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철학자] : 틀렸나?
[철학자] : 만약 진정으로 공헌감을 갖는다면 뭐 하러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겠나. 일부러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할 수 있는데 말이야. 즉 인정욕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직도 공동체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한 거라네.
[청년] : 공동체 감각만 있으면 인정욕구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 사라지네.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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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자네가 말한 고매한 목표란 마치 정사을 향해 산을 오르는 거라고 보면 되겠나?
[청년] : 네, 그래요. 사람이라면, 저라면, 산 정상을 목표로 합니다.
[철학자] : 그런데 만일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되네. 즉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거라네.
[청년] :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거는 지금 분명 길 위에 있고요.
[철학자] : 그러면, 가령 자네가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면 자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사고나 병이 나서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등산 자체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 않나? '길 위'에 있는 채로, '가짜인 나'인 채로 , 그리고 '가짜 인생'인 채로 인생이 중단되는 거지. 그러면 그 삶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청년] : 그, 그건 자업자득이죠! 제게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산을 오를 만한 체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운이 나빠서일 수도 있고, 실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이 입장은 다르다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파악하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 한다고, 하지만 인생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일세.
[청년] : 그러면 인생이 어떤 모습이라는 겁니까?
[철학자] :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의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청년] : 찰나의 연속이라고요?
[철학자] : 그래,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청년] : 인생 설계도, 커리어 설계 등도 필요 없다고요?
[철학자] : 만약 인생이 선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우리 인생은 점의 연속이라네.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일세.
춤을 추듯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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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았던 건 아닐까? 즉 길 위에 있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를 살았던 거지. 이를테면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꾼 사람은 늘, 당장 연습해야 할 악보를 보면서 한 곡, 한 소절, 한 음에만 집중했을지 모르지.
[청년] : 그렇게 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 이렇게 생각해보게. 인생이란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 하고 깨닫게 될 걸세. 바이올린이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전문 연주자가 된 사람이 있을거야. 사법고시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변호사가 된 사람도 있을 테고, 집필이라는 춤을 추고 작가가 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어쨌든 저마다 다른 장소에 다를 거야. 단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의 삶도 '길 위'에서 끝났다고 볼 수는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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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자네가 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은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네. 그에 반해 내가 말하는 춤을 추는 인생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철학자] : 여행하는 목적이 뭐지? 예를 들어 자네가 이집트로 여행을 갔네. 그때 자네는 되도록 효룰적으로, 되도록 빨리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트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텐가?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야.
[철학자] :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키네시스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5분가량 머무르고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도 상관없지.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에네르게이아적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산 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없다네.
인생 최대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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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예를 들어 대학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는 아닐세. 물론 대학 입시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몰라.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귀찮기도 하지. 하지만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즉 춤을 추는 거지.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 거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아버지도 날마다 일이라고 하는 춤을 진지하게 춰왔을 걸세. 큰 목표가 있다거나 그 목표를 달성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거지.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은 행복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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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 진지하게 살되 심각해지면 안 된다?
[철학자] : 그래. 인생은 언제나 단순하지. 심각한 게 아니라네.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 두게.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의 언제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청년] : 완결되어 있다고요?
[철학자] : 설사 자네나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
[청년] : 만약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찰나는 늘 완결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철학자] : 바로 그거지. 나는 지금까지 인생의 거짓말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네. 이제 마직마으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거짓말이 뭔지 말해주지.
[철학자] :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거지. 자네가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거야.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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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 인생이 찰나의 연속이라고 할 때, 인생이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고 할 때, 대체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나서 이런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견디며 죽음을 맞아하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철학자] :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말했네
[청년] : 인생의 의미란 없다고요?
[철학자] : 예를 들어 전화(戰禍. 전쟁으로 입은 재앙과 피해)나 천재지변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네. 전와(戰渦), 전쟁으로 야기된 혼란)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 같은 걸 말 할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인생에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그와 같은 부조리한 비극을 앞에 두고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하네. 칸트가 말한 경향성을 직시해야만 해.
[철학자] : 그런 뜻에서, 가령 엄청난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원인론에 입각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라고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봐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는 곤경에 처했을 때야말로 앞을 보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네.
[철학자] :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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