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감사(GRATIA)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 작품 :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식힐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 전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 행복했었다"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급적 다 해 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평상시 원했던 근사한 자동차를 사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26. 겸손(HUMILITAS) - 진장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 작품 :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겸손(humilitas)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청년기 때를 돌아보라.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고,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유치한 자만심에 우리가 얼마나 찌들어 있었는지를. 그래서 겸손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겸손은 우리에게 청년기의 자만심보다 더 심한 해악을 줄 수도 있다. 지나친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니가. 그렇지만 이런 절망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가 한쪽에서 반대편 쪽으로 급격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만심도 절망으로 바닥을 쳐야 한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추는 천천히 가운데서 멈춘다. 마찬가지로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해야만 우리는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27. 분노(INDIGNATIO)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 때까지 , 작품 :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분노(indignatio)이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주인공 로쟈의 논문에서는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고 주장한다.
하나는 하급 부류(평범한 사람들),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생산하는데만 기여하는, 말하자면 재료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적으로 말해 그 본성상 보수적이고 점잖은 데다가 순종하며 살고 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을 순종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렇다고 해서 굴욕감을 느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전부 법률을 넘어서는 자들, 그 능력에 따라 파괴자이거나 그런 경향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들은 극히 다양한 성명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합니다. (......) 첫 번째 부류는 항상 현재의 주인이며, 두 번째 부류는 미래의 주인입니다. 전자는 세계를 보존하고 수적으로 증대시킵니다.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목표를 향해 이끌고 나갑니다."
(............)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식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 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식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 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28. 질투(INVIDIA)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 작품 :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invidia)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친구들의 모임에 남자친구를 데려가는 여자들이 있다. 이럴 때 그녀는 시시콜콜 남자친구에게 옷차림과 이야기 방식에 대해 잔소리를 해 댈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사랑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일대일의 관계, 즉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두 사람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애인을 멋지게 포장한 다음에 친구들에게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친구들과 자신이 주연이고 남자친구는 잘해야 예쁜 조연 정도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상관없다. 문제는 그 멘트에 빠져든 친구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애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피력하고, 심지어 애교마저 떠는 것 같다. 예상치도 못한 질투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질투의 감정이 클수록 그녀는 서둘러 남자친구를 데리고 어색한 부위기에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을 빼고 자기 친구와 애인이 순간적이나마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바로 이것이다.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 그렇다고 이 여자가 다시 남자친구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당신만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줘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사랑일 테니가 말이다.
29. 적의(IRA) -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허망한 전투 , 작품 :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적의(ira)는 미움에 의하여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들을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슬픔과 우울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자신에게 우울함과 슬픔을 안겨 주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미움은 적의에 비하면 그나마 상황이 나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의는 그 미움의 대상에게 구체적인 해악을 가라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서 어떤 사람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적의라는 무서운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
누군가에게 가하는 해악을 꿈꾸거나, 아니면 직접 실행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적의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내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형법에 저촉될 수 있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다. 어쨌든 적의는 비록 뒤틀려 있기는 하지만, 욕망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을 해치는 구체적인 해악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엄청난 결핍감을 느끼게 되고 , 반대로 구체적인 해악이 성공했을 때는 하늘에 뛰어오를 듯한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으란 얼마나 치명적적인 욕망인가. 그러니 적의를 느끼는 사람과는 하루속히 결별하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도 나도 모두 적의라는 감정에 의해 산산이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30. 조롱(IRRISIO) - 냉소아 연민 사이에서 , 작품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조롱(irrisio)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평소에 일을 못 한다는 자신을 갈구는 직장 상사가 사장에게서 무능하다는 질책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혹은 똑똑한 척하는 얄미운 후배가 웬만한 사람도 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때도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아니면 성인군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밥맛 떨어지게 행동했던 어느 지식인이 치명적인 스캔들에 빠질 때, 우리의 마음은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흥분되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조롱이라는 감정이다. 이렇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할 때, 우리는 잠시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네. 너도 별수 없는 인간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속으로만 풀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의 불행에 기쁨을 표시하는 수간,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럴 때 능숙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내심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테니 말이다.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라. 내심 조롱을 아끼지 않고 있던 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희열이란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처럼 조롱이라는 감정에는 무엇인가 병적인 데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우리는 미움과 슬픔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31. 욕정(LIBIDO) - '프레스토'로 격하게 요동치는 영혼 , 작품 : 『악마』. 톨스토이
욕정(libido)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이나 성교에 대한 사랑이다. (......) 성교에 대한 이런 욕망은 적당한 경우에도, 그리고 적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보통 욕정이라고 일컬어진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섹스는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그렇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가 사랑의 완성이라고 쉽게 믿고 있다. 섹스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한 착각이다. 금욕주의적 가치관이 유교적 관습에 기독교적 관념이 결합되면서 더 강화되어 왔다. 심지어 아직도 젊은이들에게 순결 서약을 강요하는 것은 남루한 우리 사회의 단면 아닌가. 그렇지만 금욕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금기와 금지는 욕망과 상상력을 더욱 부채질하는 법. "들여다보지 마세요!" 길을 걷다가 벽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으면, 누구나 벽 안을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만 가지 상상이 작동하게 된다. "벽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결국 사회를 음란하게 만드는 것은 놀랍게도 금욕주의적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드니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폐해를 고스란히 우리들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도 섹스를 금기시하면서 동시에 섹스를 신성시하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사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은 다른 것이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욕망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한다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
32. 탐식(LUXURIA) - 자신의 동물성을 발견할 때 , 작품 : 『먹는 일에 대한 이야기 둘』. 모옌
탐식(luxuria)이란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immoderata) 욕망이나 사랑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 사랑하는 타자의 공백이 주는 공허감을 먹는 것으로 충족하려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멋잇다'가 '맛있다'로 옮겨지는 슬픈 순간이다. 그렇지만 타자의 자리를 어떻게 김치 비빔밥이나 스파게티가 채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런 식의 식용은 항상 눈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이별을 겪었으면서도 음식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개나 돼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홀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자신의 버려진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가 아니어도 좋다. 성적이나 업적 등등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때 발생하는 원초적인 충만감의 기억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좌절할 때마다 음식을 먹는다면, 쉽게 비만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내 주변을 보면 약간 뚱뚱한 사람들 중에서 쉽게 좌절하는 타입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금방 좌절하고 공허감을 느끼니, 그들은 쉽게 먹을 것에 손을 대 왔고, 또 댄다. 그러니 집안사람들은 안 그런데 혼자 뚱뚱한 사람을 만나면, 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는 여린 영혼의 소유자일 수도 있으니까.
33.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 작품 :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병에 걸릴까 봐 두렵다. 해고될까 봐 두렵다. 가난해질까 봐 두렵다. 사랑이 떠날까 봐 두렵다. 이처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 상실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한때 병으로 고생했거나, 한때 실직을 했거나, 한때 실연을 당했던 사람은 미래도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발생한다고 하겠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를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어쨋든 두려움은 우리의 현재를 좀먹는 감정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픈 기억은 우리를 과거로 보내고 , 지나친 염려는 우리를 미래로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 즉 건강, 젊음, 직장, 애인 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잠시 내 곁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음이니 건강이나 모두 어느 사이엔가 떠날걸 염두에 둔다면, 젊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해고되든 내가 떠나든 간에 지금 회사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인식한다면, 직장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인도 언젠간 떠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애인과의 근사한 키스에 더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 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34. 동정(MISERICORDIA)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 작품 :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동정(misericordia)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삶이 너무나 궁핌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
동정에는 묘한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 받는 사람은 비슷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은 연민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라고 하겠다. 멋진 남자친구를 둔 여자는 아직도 미혼인 데다 연애도 하지 않는 친구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연민의 감정에는 모종의 우월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남자친구에게 차인 경험이 있는 여성이 최근 실연의 비극을 겪은 친구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이 바로 동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친구 사이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연애가 꼬이는 걸까?"라는 느낌. 그러니까 나나 너나 똑같은 비극에 빠졌다는 일종의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이 바로 동정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러니 충고를 할 때 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동정의 표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도 통과한 동장이 있다고 하자. 동창회에서 우리는 그가 최근에 자신이 다니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가 그의 아픔에 동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그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 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에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나 동정하지 말지니! 충분히 우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반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35. 공손(AVERSIO)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작품 :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이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기 보다 항상 타인의 욕망을 따르려고 하니 온화하다드니 공손하다느니 하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타인의 욕망을 따르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폐인이 될 것이다.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반면 타인의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첫 번째 부류의 인간은 정말로 위험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정에서 약한 아내나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첫 번째 부류의 남자를 만날 때 여자들은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에 속아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조심하라. 법 없이 살 사람을 조심하라! 이건 생활의 철칙이다. 결국 우리가 가까이 해도 되는 유일한 인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니, 적과 동지가 명확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된다면, 이런 사람과는 주저하지 말고 사랑에 빠져도 된다.
36. 미움(ODIUM)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기되거나, 작품 :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미움(odium)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헛소리다. 정말로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거나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한 번도 제대로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무관심일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미움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그래서 둘 중의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야 끝날 수 있는, 한마디로 저주받은 관계다. 불행히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게 된다. 그래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항상 처절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과 무관심한 관계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관계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움만큼 비극적인 감정이 또 있을까. 어떤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관계를 소망하도록 만들 정도로 처절한 감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미움이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감소시켜서 우리를 고사목처럼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그러니 자살하기 싫으면, 상대를 죽일 수밖에, 반대로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자살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게 될 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순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미소를 띠울 일이다. 다행스럽게 그는 미움이라는 비극적 관계를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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