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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길을 밝히다(독서)

【강신주의 감정수업】4부 : 바람의 흔적

by 공자 (공영효) 2022. 3. 11.

37. 후회(POENITENTIA)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작품 :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마스 하디

 

후회(poeniteni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후회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지 않을 때 그렇게 쉽게 짜증을 내곤 한다. 후회는 불행한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후회라는 감정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유아적인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후회라는 검장은 생길 수도 없다. 후회에 금방 젖어드는 사람에게는 대학에 떨어진 것도 오로지 자기 탓이다. 대학 정원 같은 구조적 문제라든가 학과 선택에 있어서 부모님의 강요 혹은 공부에 몰두하기 힘든 가정환경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실연당한 것도 완전히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애인이 더 멋진 이성을 만나서 자신을 떠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인이 학업 때문에 자신을 멀리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 후회라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가능하다. 한마디로 타자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후회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몇 가지 지혜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소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기치 않은 행복이나 불행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

 

 

 

38. 끌림(PROPENSIO) -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작품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끌림(propensio)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 불행한 가족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은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조금만 잘해 주어도 금방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충'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여자가 있다고 하자.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정말 맛나게 잘 드시네요."라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가족을 떠나 그와 새로운 삶을 꾸리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남자와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녀는 금방 그에게 심드렁해질 것이다.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남자보다 조금 더 잘해주는 남자기 생긴다면, 그녀는 금방 새로운 남자에게 또 끌리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지만 그 대가로 화려한 연예인이 되는 데 성공했던 여배우들의 경우에 대부분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파탄 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9. 치욕(PUDOR) - 잔인한 복수의 서막,  작품 : 『토요일』. 이언 매큐언

 

치욕(pudor)이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고전 [한비자]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거꾸로 된 비늘'이라는 뜻이다. 용의 머리 뒤편에는 다른 비늘 방향과 반대로 되어 있는 비늘이 모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용을 탄 사람이 잘못해서 그 부분을 만지게 되면, 용은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려 자기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한비자가 용의 거꾸로 된 비늘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역린'이 있으니,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빠지지 않는 뱃살이 역린일 수도 있다. 누군가 뚱뚱한 사람에게 "어머. 건강해 보여서 너무 다행이지."라고 말했다고 하자. 뚱뚱한 사람은 그 말에 모욕감을 느끼고는 자신의 치부를 건드린 그 사람에게 적의와 반감을 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못 배운 부모가 역린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머니는 무슨 과 나왔니?"라고 가볍게 되묻는 것조차 상당히 위험한 말이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살의를 견디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이혼 경력이 역린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요즘 싱글이 돌아온 대세야."라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혼한 사람은 그 말을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마다 역린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강한 반감을 표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외모를 역린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그가 처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외모가 역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좋은 인간관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있는 사람의 역린을 먼저 파악할 일이다. 역린만 건드리지 않고 보호해 준다면, 우리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웬만한 섬세함이 아니고서는 사람마다 다른 역린, 그리고 상황마다 옮겨 다니는 역린을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40. 겁(PUSILLANIMITAS)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작품 : 『여명』.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겁남(pusillanimitas)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인간은 겁이 많은 존재다. 그래서 종교까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칠까 봐 두려워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 결국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이빨이 썩을까 봐 달콤한 초콜릿을 먹지 못하는 사람, 실연의 공포 때문에 프러포즈를 거부하는 사람, 시험의 공포 때문에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 사고가 날까 봐 여행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니 더 강한 욕망의 대상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웬만한 욕망의 대상으로는 항상 미래의 실패가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염두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아주 매력적인 그리고 강렬한 대상을 만나야 한다. 너무나 근사해서 뿌리칠 수 없는 초콜릿을 발견하면 이빨이 썩는 것쯤은 무슨 대수이겠는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 번의 키스라도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중에 올 실연이 뭐 그리 두렵겠는가. 너무나 환상적인 공연이어서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느낀다면, 내일 시험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매혹적인 대상과의 우연적인 마주침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바깥으로 자주 나가야만 한다.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41. 확신(SECURITAS) - 의심의 먹구름이 걷힐 때의 상쾌함,  작품 :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확신(securitas)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나는 너를 믿어!" 정말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지혜로운 사람만이 상대방의 깊은 의심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용수철이 눌려진 것처럼 압력을 받아내고 있는 이 조용한 의심은 언제든 튕겨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확신과 의심 사이를 저울추처럼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역량보다 타인에게 더 많이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대로 타인이 움직일 때 행복해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여기에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이라는 감정도 덤으로 자라나게 된다. 확신과 의심이라는 확실한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하나의 슬로건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 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확신하거나 의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고민해야 될 것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 혹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의심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러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심과 확신에 갇힌 사람이라면 이제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도록 하자. 그러면 아마도 너무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영원히 확신과 의심 사이를 방황하는 길 잃은 영혼으로 남게 될 것이다.

 

 

 

42. 희망(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실한 기다림,  작품 :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spes)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 아닌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곳에 반드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희망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희망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이 품고 산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음껏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다. 반면 어른들은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여러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삶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만다. 그러면서 우리는 희망에 부푼 삶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삶에 불과하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가?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럴 때 하루하루 매너리즘에 빠진 삶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조그만 희망들을 품어 보도록 하자. "나는 화가가 될 거야. 멋진 유화를 그릴 거니까." "나는 ㅎ플라밍고 기타를 배울 거야." "나는 마추픽추에 갈 거야."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내 마음에 희망은 더욱더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내 곁에 더 머물 테니까.

 

 

 

43. 오만(SUPERBIA)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작품 : 『위험한 관계』. 피에르 소데를로 드 라클로

 

오만(superbia)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너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이 없어." 오만한 사람의 내면을 이만큼 분명히 보여 주는 표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전지전능하다는 자신감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래서 오만은 항상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전지전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만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죽기 쉽고, 암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추락사하기 쉽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할 때, 우리는 절로 탄식이 나온다. "도대체 자동차는 무엇이며, 자동차를 안다고 자임하던 나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암벽은 무엇이며, 암벽을 잘 안다던 나는 또 누구인가."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암벽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암벽을,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때는 사랑받았던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변하는 자동차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암벽의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또 애인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당할 수밖에.

 

 

 

44. 소심함(TIMOR)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작품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소심함(timor)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소심함과 대담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극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매사에 소심하게 된다. 반대로 결과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대담하게 된다. 소심함이든 대담함이든 두 감정 모두 극단적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소심함에는 미덕이 한 가지 있다. 미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심한 사람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담함에도 예상하기 힘든 후유증이 있기는 하다. 미래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대담한 사람은 비관적인 결과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지라도, 타자는 우리의 예측 이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예측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지나치게 대담한 사람에게는 소심함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소심한 사람에게는 대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소심함과 대담함을 중도, 혹은 중용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 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될 것이다.

 

 

 

45. 쾌감(TITILLATIO)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작품 :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laetitia)의 정서와 쾌감(titillatio)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정신과 육체에 모두 기쁨, 즉 쾌감은 자주 찾아오는 경험이 아니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만 우리는 쾌감을 소망할 수 있다. 섹스, 춤, 그리고 스포츠가 쾌감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춤이나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섹스에서도 쾌감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와 얼떨결에 섹스를 나누게 되었다고 하자.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나 흡족하게 섹스를 즐길 수도 있다. 섹스를 마친 후 그 상대방은 완전히 다른 남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그 남자만 생각해도 정신은 기쁨으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함께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을 기쁨에 젖어들게 하는 남자가 있다. 기대감을 품은 채,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자.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섹스에 서툴 뿐만 아니라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 후 과연 이 남자를 떠올렸을 때, 여자는 기쁜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느 때 불행을 느끼는지 계속 응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정신으로 "이럴 때 자신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도 직접 몸으로 겪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46. 슬픔(TRISTITIA)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작품 :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tristitia)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절대적인 기쁨이나 절대적인 슬픔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불행히도 우리는 영원을 구가하는 신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은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감정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은 타자와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조금만 더 잘해 주는 타자가 등장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내게 기쁨을 안겨 준 그 타자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타자보다 더 많은 기쁨을 주는 타자가 또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새로운 타자가 기쁨의 대상이 되는 만큼, 과거 기쁨을 주었던 타자는 자연스럽게 슬픔의 대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건 슬픔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우리이게 슬픔을 주는 타자일지라도, 나에게 더 심한 슬픔을 주는 또 다른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과거의 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슬픔을 주는 대상이라면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냥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기쁨을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에만 집중하자.

 

 

 

47. 수치심(VERECUNDIA)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작품 :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verecundia)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 두꺼워 수치스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다. 최소한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얼굴이라도 붉게 상기되는 것이 정상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운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정말 화가 나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혹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당당하기까지 하다.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생기면 가방을 던지거나 심지어 자신의 거대한 몸을 날리는 아주머니들, 새치기를 해 놓고서는 태연자약하게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직장인들,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서 정원초과를 유발해 놓고도  내리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 한때 그들은 섬세한 감성을 지닌 여학생, 혹은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헌신했던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뱀처럼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발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도 자신의 행동이 당당할 때, 그러니까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자존감, 혹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을 다시 느끼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이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딸이 곁에서 보고 있는데도 몸을 날려 빈자리를 잡으려는 어머니는 없을 것이고, 후배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새치기를 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또 아무리 뻔뻔한 아저씨일지라도 최근에 만나 호감을 느끼는 여자가 앞에 있다면 결코 만원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48. 복수심(VINDICTA) - 마음을 모두 얼려 버리는 지독한 냉기,  작품 : 『빙점』. 미우라 아야코

 

복수심(vindicta)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잘해 주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위해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일단 함무라비 법전을 관철시키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한다. 강한 자에게 핍박을 받은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를 시행할 힘조차 없는데, 이럴 때 예수의 속삭임이 우리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며 찾아온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는 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야." 이런 속삭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자신에게 원수를 갚을 수도 있고 갚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양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약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강자에게 복수할 수 조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이든 복수든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자, 혹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조차 없다. 강자가 되었을 때에만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해악을 당했지만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서 강해져야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치욕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마침내 해악을 가한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 결정할 수 있다. 계획대로 복수를 추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