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꿈이 헛된,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의 근원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에서
13. 당황(CONSTERNATIO) - 멘붕, 즉 멘탈 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 작품 :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당황(consternatio)이란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단순한 후배나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 때가 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어서 결혼했지만, 허니문 여행에서 그와 섹스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폄하했던 내가 부득이하게 클럽에 들어갔는데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기는 낯선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전혀 예상치 않았던 욕망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14. 경멸(CONTEMPTUS) -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 작품 : 『여인의 초상화』. 헨리 제임스
경멸(contemptus)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누군가를 경멸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더 불행한 사람은 경멸당하는 사람일 테지만,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가 어떻게 남자를 쉽게 포기하겠는가.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이 느낀 기쁨을 포기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비극이 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기쁨을 느끼지만,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인 셈이다. 그래서 여자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남자를 떠나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도 있다. 아니면 남자를 억지로라도 붙잡아서 둘 다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도 있다. 억지로 붙잡힌 남자는 슬픔에 빠져들 것이고, 그의 슬픔은 여자를 또 슬프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불행히도 여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억지로라도 남자를 곁에 두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남자가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행복하게 해 주면 그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으리라 기대다. (...........)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경멸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체 옆에 있는 느낌을 얻는 경험은, 이제 알겠는가? 경멸당하지 않으려면 내게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을 쿨하게 보내 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15. 잔혹함(CRUDELITAS) - 사랑의 비극 , 작품 : 『인생이 베일』. 서머짓 몸
잔혹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한때 사랑했던 남녀가 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한 사람은 여전히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중 왜 한 사람만이 사랑이 식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사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방의 사랑은 떨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배신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나인 셈이다. 배신의 피를 혼자만 묻히고 있는 것이 싫어서일까, 나는 상대방도 사랑을 배신하는 피를 흘리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바로 잔인함이라는 감정의 서글픈 실체다. 내가 지금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상대방의 가슴에 잔인한 행동과 잔혹한 말을 비수로 던져 피를 흐르게 할 참이다. 슬프게도 이런 식으로 한때 두 사람을 천상에 살게 했던 사랑은 피를 흘리며 무참히 살해된다.
16. 욕망(CUPIDITAS)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 작품 :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하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인간에게는 원숭이와 같은 속성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주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마 가장 결정적인 타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들이 명문대 입학을 욕망하면, 나도 명문대 입학을 원한다. 그들이 단정한 외모를 원하면, 나도 기꺼이 단정한 외모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헛갈린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나의 고유한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이런 고뇌의 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 욕망하는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 보아야만 한다. 실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나의 것이었는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를 욕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와 고대하던 첫날밤을 지낸 뒤, 우리는 바로 알게 된다. 앞으로 이 남자와 보낼 날이 희망 속에 떠오른다면, 그 남자에 대한 욕망은 나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이제 이 남자랑 뭐 하지?"라는 허무한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 낸 남자를 욕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작가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 이런 식의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다른 방법은 없다!
17. 동경(DESIDERIUM)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 작품 :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동경(desiderium)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한때의 전성기' 혹은 '가장 절정에 있었던 순간'을 꿈꾸는 것이 동경이다. 그렇지만 동경의 이면에는 자신이 전성기를 지났고 절정에서 내려와 있다는 씁쓰름한 자각이 깔려 있지 않은가. 너무나 나이가 들어 이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동경은 마지막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카페나 술집에 들릴 힘이 있을 때, 충분히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 갈 수 있을 때, 동경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한마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별다른 불편이 없는 사람이 과거를 동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절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과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 과거 애인을 잊지 못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새로운 절정을 향유할 수 있겠는가. 꽃은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나무는 매년 기적처럼 새로운 꽃을, 작년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신선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만 동경하고 있느라 올해 필 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직 움직이는 데 여력이 있다면, 과거에 피웠던 꽃망울에 대한 동경일랑 접고, 지금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햇빛도 있을 것이고, 뿌리를 뽑을 것 같은 비바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당당히 맞설 때에만, 삶의 절정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18. 멸시(DESPECTUS) - 사랑이라는 감정의 막다른 골목 , 작품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드워드 올비
멸시(despectus)이란 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우리는 감정의 원인을 내가 만난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19. 절망(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 작품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 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기대도 그만큼 줄어틀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20. 음주욕(EBRIETAS) -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발버둥 , 작품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음주욕(ebriatas)이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동창회에서 충돌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과거 영광스러운 권좌에 앉아 있던 사람과 과거에는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 존경받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사이에서 동창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싸움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왕과 현재의 여왕 중 누가 동창회 모임에서 큰소리를 낼 것인가. 이것은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과거의 여왕이 대취할 테니까 말이다.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그녀는 독한 소주라도 마시고 또 마실 것이다. 현재를 깨끗이 잊을 정도로 마시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여왕은 다시 화려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취기를 빌려 과거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그녀는 현재의 여왕이 과거에는 자기 시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계속 좌중에게 주시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대부분 친구들은 과거의 여왕이 취했다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술주정만 탓할 테니 말이다. 이어서 그들은 과거의 여왕을 버리고 단호히 현재의 여왕 편을 들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침에 대한 슬픈 보고서, 그래서 술을 마시게 만드는 묘한 공간으로 동창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21. 과대평가(EXISTIMATIO) -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작품 : 『허조그』. 솔 벨로
과대평가(existimatio)이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과대망상에 빠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른들이 "눈에 콩깍지가 쒸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흥분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는 뉘앙스가 전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 자체에 이미 주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은가. 사실 사랑에 빠진 친구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매우 걱정했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친구의 애인이 매우 우유부단한 사람인데, 친구는 그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친구의 애인은 경제적이 능력이 떨어지는데, 친구는 그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언젠가는 억대 연봉을 받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 그렇지만 친구들의 경우든 내 경우이든,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랑은 과대망상이라는 감정 상태가 지속될 때까지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애인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과 판단을 친구가 수용한다면, 불행이도 친구가 불태우던 사랑의 열정은 이미 꺼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노파심에 가득 찬 친구들의 충고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도 사랑은 이미 떠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친구들을 걱정하는 것이나 친구들이 사랑에 빠진 나를 걱정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다. 그런 우려와 걱정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기꺼이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자격도 없는 것 아닐까?
22. 호의(FAVOR)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 작품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호의(favor)이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누구든지 애인과 우정을 맺고 있는 친구에게는 호의를 베풀기 마련이다. 참 고마운 사람 아닌가. 애인을 아껴 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애인의 친구도 처음에는 아무런 의도 없이 내 호의에 대해 호의로 응대해 준다. 그의 입장에서도 친구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호의를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애인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는 호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내가 애인과 소원해질 때 발생한다. 나나 내 애인은 잠시의 냉각기라고 생각할 뿐,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냉각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인의 친구와는 계속 호의를 주고받게 된다. 애인과 소원해졌을 뿐 애인의 친구와 맺은 관계에서는 달리 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살짝 심드렁해진 애인보다는 애인의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드디어 심각한 본말전도가 벌어진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함께 있으면 기쁜 감정이 들 때 그게 바로 사랑 아닌가. 이제 나와 애인의 친구는 진신을 직시하기만 하면 된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호의는 무척 위험한 감정이다. 왜일까? 첫째, 호의는 애인의 친구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 사람에 대해 무장 해제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애인과 소원해질 때 서로 주고받던 호의는 금방 애인을 배제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잘못된 만남은 바로 이 호의라는 감정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자신의 애인을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거나 셋이 함께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말기를
23. 환희(GAUDIUM) - 원하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의 기적 , 작품 : 『판결』. 프란츠 카프카
환의(gaudium)이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등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소망하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환희를 느끼는 사람은 너무나 여리다는 점이다. 소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루려고 하지도 않고, 혹은 기대감을 상당히 줄여 놓을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만이 환희라는 감정을 자주 느낄 것이다.(..............) 매사에 환희를 느끼고 쉽게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소극적인 경우가 대분분이고 타인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환희란 그다지 축복할 만한 감정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극적이고 여리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24. 영광(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 작품 :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gloria)이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영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찬탄하는 것을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등이 되려는 것도, 권력을 잡으려는 것도, 섹시한 몸을 만들려는 것도, 고급 아파트에 살려는 것도, 대기업에 취업하려는 것도, 명품 가방을 사려는 것도,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려는 것도 모두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어쨌든 지나치게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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