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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길을 밝히다(독서)

【모든 삶은 흐른다】 2. 저 멀리 삶이 밀려오다

by 공자 (공영효) 2024. 7. 5.

나답게 살기
모든 섬은 마침표와 같다. 바다 한가운데에 찍힌 점. '나는 난'라고 하는 강조라고? 아니, 이것은 선언이다. 자신에 대한 선언. 페테르 1세 섬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특정한 누군가나 무언가에 의해 분류되지 않는다. 나답게 사는 것은 어렵지만 뿌듯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우리가 배워야 하는 태도다. 물론 인간이기에 외모가 근사한 사람, 나이가 젊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따라 할 수는 있다.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에 맞춰 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홀로 떠 있는 섬처럼 우리는 누구와도 똑같을 수 없다. 내가 아닌 '거짓 자아' 뒤에 숨겨진 나만의 섬을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야 한다. 단순히 남과 달라 보이고 튀고 싶어서 억지로 개성 있는 척을 하는 건 의미 없다. 억지로 보여주는 개성은 또 다른 순응주의에 불과하다. 자신이 지닌 개성에 자발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취향, 내가 싫어하는 것, 나만의 생각,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의 추억, 나의 슬픔과 상처, 가끔 드러내는 나의 꿈? 아니면 나의 행동, 내가 한 약속,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노력?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나는 나다워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답게 살지 않는 일상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쓴다. 나답게 사는데 방해가 되는 집착, 사랑 혹은 슬픔에 파묻혀 있고, 주변에서 원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말 한 말 중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 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내뱉은 게 얼마나 많았는가? 평범하게 만족하거나 그냥 참고 견디거나 지루한 일상에 몸을 맡길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화산 대륙으로 둘러싸인 넓고 넓은 바닷가에 홀러 떨어진 섬이 되어 신성한 자신만의 풀을 품고 살자. 타협하지도 모방하지도 말자. 다수에 속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지도 말자. 혹은 롤 모델로 삼은 사람들과 비슷해지려고 지나치게 서두르지 말자.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교류하고 나누되 무리하게 남들과 맞추지도,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도 무리하게 휩쓸리지도 말자.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자기 자신'이라는 유일한 섬이 되자.
 
파도처럼 인생에도 게으름과 탄생. 상실과 풍요, 회의와 확신이 나름의 속도로 온다.
 

항해

멀리 떠날 수 있는 용기
우리는 순응하고 참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받아들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체념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쳇바퀴 같은 일상이 이어지면서 무엇인가에 갇힌 기분이다. 자유를 어딘가에 저당 잡힌 것 같은 기분. 어떻게 하면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넓디넓은 바다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떠나야 한다! 파도와 위험이 도사려도,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있어도 생애 단 한 번은 평생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바다는 거칠 것 없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경계도 장애물도 없는 무한의 자유다. 바다를 향해 간다는 건 방랑이 아닌 용기 있는 삶이다. 실제로 먼바다로 나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구속과 의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서 자유로워질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프랑스어로 '구속'을 뜻하는 'contrainte'는 '꽉 죄는 행위'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에 꽉 죄어 인내와 한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먼바다에 나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먼바다에 나갔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하늘뿐이다. 그곳에 있으면 몸이 자유롭게 떠오른다.
가끔 우리는 인생을 헛사는 것 같다고 느낀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마음을 졸이고 압박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결심한다. '그래, 떠나자! 근데... 언제 떠나지? 내일? 이번 여름? 어쩌면 내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매번 준비는 하는데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에게 바다는 자유를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진짜 삶을 살려면 중요하지 않는 것, 머릿속에서 종일 떠도는 쓸데없는 잡념과 걱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낭비해서는 안된다. 남들에게 끌려다니고,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도 원하지 않는 것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싶은가? 바다는 우리에게 인생을 막살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자신을 아껴야 한다. 지금까지 의미 없는 것들을 고민하느라 체력과 재능을 너무 낭비해 왔다.
우리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자.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강렬한 설렘을 주는 것에, 진실된 것에 주목하자. 다른 사람에게 휩쓸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자. 저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에게 나를 증명하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넓은 바다의 바람이 우리를 부른다. 이제 답답하게 얽매여 있는 우리의 삶에 자유를 안겨줄 때다.
 

헤엄

자아라는 부담과의 결별
바다는 유동성의 순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그 어떤 것도 경계가 있는 공간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바다는 경계를 알 수 없이 모든 것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반대로 육지는 서로 이어지지 않는 영역처럼 보인다. A 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해야 하고, 국경과 영역이 없는 무한대에서 수영할 수도 없다. 
넓고 넓은 바다는 파편화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바다에 둘러 싸여 있으면 진짜 '가볍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신체적인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물론 바다에 있으면 옷도 거의 입고 있지 않고 짐도 없으니 물리적으로도 가벼운 건 맞다. 하지만 진짜 가볍다는 건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자아'의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가벼움은 예술이다. 평소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무게에 눌러 있다. 과거, 잃어버린 행복, 실연, 현재 이뤄야 할 것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라는 무게에 눌려 있다. 견디기 힘든 가장 무거운 것은 자아다. 자아가 무거운 이유는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때문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만든 그것 말이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 때문에 자아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정작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자아의 여러 이미지와 함께 살고 있다.
수영을 하면 이러한 자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되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전체에 속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바다를 느끼는 것은 광활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자아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증명하기, 자랑하기, 타인을 무시하기, 포기하기 등 자아가 지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거품이 빠진 자아는 고귀해서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평소에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남 앞에서 연기를 하고, 1등이 되고 싶어 하고,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주목받고 싶어 한다. 어떻게 보면 추악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우아한 자세인데도 자아에는 이러한 우아함이 없다.
수영은 나르시시즘을 덜어내는 연습이다. 내가 정한 목표를 꼭 이루고 싶어 조바심이 든다면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상품처럼 나 자신을 포장하겠다는 자아와 결별함으로써 그 조바심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 후에 내가 얻는 것이 뭐냐고? 그것은 자유, 무중력,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바다소금

가진 것을 새롭게 음미하는 법
바다는 아주 짜고,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짠맛을 못 느끼게 된다. 그 맛을 음미하는 능력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늘 향수를 뿌리고 다니면 더 이상 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과거에 맛본 만족감을 희미하게 만들고 감흥을 없앤다. 그래서 한때 매력을 느낀 것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바닷물처럼 처음 짠맛을 그대로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걸까? 왜 감흥이 점점 없어질까? 우리가 변해서? 우리의 취향은 변할 수밖에 없어서?
익숙한 것으 더 이상 탐구하고 새롭게 감상할 수 없게 된다.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일단 어느 정도 채워지면 순서대로 수그러든다. 이미 손에 넣었기에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늘 살던 동네? 너무 잘 알아서 감흥이 없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 더 이상 흥분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권태기가 왔다고 한다.
이외에 또 다른 안타까운 심리가 있다. 이미 가진 것은 더 이상 원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것이다. 사물 본연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이 사물에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뿐이다.
모든 것에서 쾌락을 느끼라는 게 아니다. 하나를 정해 여유를 가지고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소비 행위가 아니다. 욕망은 타깃을 정해 먹고 마시고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음미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특함과 풍요로움에서 무뎌져 모든 걸 잊고 말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계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계속 음미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중에 없어지고 나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달아도 소용없다.
욕망의 목적은 바닥까지 소비하여 자극만 취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광기나 과음과는 다르다. 욕망은 현재 경험하는 것에 두는 관심이다. 공감, 오랜 우정을 소중히 하는 따뜻함, 생각지 못한 대화, 칭찬, 실제로 경험한 소중한 찰나에서 얻은 짜릿함의 음미는 강렬함과 부드러움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크라켄

새로운 지식으로 편견 부수기
경계를 넘게 해주는 재능이 있다면, 그건 바로 '호기심'이다. 호기심 덕분에 우리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다. 호기심이 있으면 늘 다니던 길로만 가지 않고 미지의 땅으로 방향을 틀어 용들과 신비한 괴물들과 마주할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몸을 사리며 산책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만 갈 때가 많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고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험을 떠나 새로운 지식과 만나야 한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하고 아직 가보지 않은  곳에 갈 수 있어야 한다. 기존에 품고 있던 생각에 함몰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의심하며 편견을 깨고 움직여야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너무 빨리 확신하고 답을 정해버린다.  그 모든 것이 편견으로 발전해서 우리를 가두는데, 우리는 이를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기존에 가졌던 안전한 확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알게 되면 호기심의 불꽃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활활 타오른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새로운 것을 더 발견하려는 욕구가 커지는 것이다.
매일 자신만의 지도 위에서 새로운 곳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연습, 같은 바다만 알고서 끝내지 않고 새로운 바다를 수집하듯이 즐겁게 탐구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미 증명되고 나와 있는 답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의 시야와 탐구 분야를 넓혀보자.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먼저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앞으로 더욱 알아갈 수 있다. 미지의 존재 혹은 용들과 맞서는 순간에 우리만의 확신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