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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 클라이머 알렉산더-토마스 후버 형제의 등반기

by 공자 (공영효) 2020. 2. 14.


독일의 유명 클라이머 알렉산더-토마스 후버 형제의 등반기

독일의 유명한 거벽(巨擘) 클라이머 알렉산더(Alexander, 이하 알렉스)-토마스 후버(Thomas Huber) 형제는 알프스에서 여러 개의 수직 화강암벽과 석회암 절벽을 등반하며 가이드로 일했다. 그들의 첫 번째 뛰어난 등반 업적은 미국 요세미티의 엘 캐피탄(높이 900m·이하 엘캡)에 위치한 살라테 월(난이도 X, 5.13b)을 프리클라이밍으로 초등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4명의 동료들과 카라코룸 중부 라톡 Ⅱ(7,108m)의 수직고 1,000m인 서벽을 초등했다.

엘니뇨의 인듀런스 코너를 등반 중인 후버 형제.

그들의 최대 등반위업은 요세미티 엘캡의 노즈 루트 좌측 남동벽에 자유등반으로 신 루트인 ‘엘니뇨(37피치)’를 개척한 일이었다. 동생 알렉스는 말한다.


“거벽 등반의 성공 여부는 오직 클라이머가 지니고 있는 자신감에 달려 있다. 내가 오늘 이 벽을 등정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의 형 토마스 후버는 말한다.


“사람은 꿈꾸기 위해서 존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꿈이란 또한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계속 꿈꾸는 자에게는 오늘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일이면 이룩될 것이다.”


알렉스, 형의 사고로 라톡Ⅱ 자유등반 대신 엘캡 진출


그들의 등반 업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클라이머 라인홀트 메스너 덕분이었다. 메스너는 후버 형제들의 등반 열정과 독창성과 등반 스타일(프리 클라이밍)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의 자유 등반기를 입수해 번역하고, 보기 드문 우수한 등반사진과 함께 2000년 <더 월(The Wall)>이란 산서를 간행했다. 또한 동생 알렉스는 2002년 살라테 월의 자일 파트너 하인츠 차크와 함께 산서 <요세미티>를 간행했다.


세계적인 거벽 클라이머 알렉스는 14세 때 독일의 유명한 산악인 라인하르트 카를(Reinhard Karl)의 저서 <Zeit zum Atmen>을 읽고, 곧 그를 자신의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았다. 그의 우상 카를의 등반 행동반경은 널리 아시아의 히말라야, 카라코룸을 거쳐 남미의 파타고니아, 그리고 마침내 북미의 요세미티로 이어졌다.
알렉스는 동부 알프스에서 등반기술을 익힌 후 스페인의 라 람블라(La Rambla, XI/8c+)를 초등하고 일급 클라이머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형 토마스와 합동등반을 시작해 세계에서 등반이 가장 어려운 석회암 루트 여러 개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했다. 특히 토마스가 18세가 되던 1984년 형제는 독일의 포이에르회른들((Feuerho"rndl)의 북벽 ‘침묵의 끝(End of Silence, 높이 350m·난이도 X+)’ 루트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 루트의 5피치를 돌파하고 실패한 후, 2년 후 재도전해 등정했다.


1994년 8월 15일 토마스는 동생의 확보를 받으며 이 루트(End of Silence)를 레드포인트(루트를 사전 정찰하고 자유 등반함)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루트상의 오버행 구간 ‘오픈 에어(Open Air·XI/9a)’를 비롯한 여러 개의 바위 지붕들을 돌파하고 레드포인트 등정에 성공해 산악계를 경악케 했다. 후버 형제들이 동부 알프스에서 새로운 등반 스타일을 고집한 것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등반의 발전 자체를 위해서였다. 


후버 형제의 다음 목표는 카라코룸의 라톡 Ⅱ 서벽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Lynn Hill)이 1994년 요세미테의 노즈(Nose)를 23시간 만에 단독으로 프리클라이밍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도 이 거벽에 자유등반 루트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런데 형 토마스가 알프스에서 스노보드를 타다가 발목에 골절상을 입어, 알렉스 혼자만 1995년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미국 요세미티 엘캡의 수많은 루트 중에 남서 버트레스 노즈 루트, 그 좌측의 남서벽에 위치한 살라테 월(Salathe Wall), 그리고 노즈 우측의 남동벽에 위치한 북아메리카 벽(North America Wall) 3개 루트가 가장 유명하다. 


노즈는 1958년 워렌 하딩(Warren Harding) 일행이 크랙과 홀드가 없는 슬랩에 125개의 익스펜션 볼트를 박아, ‘볼트 사다리’를 만들며 45일 만에 초등한 루트이다. 노즈의 고전 루트는 벽 하부의 난이도 5.10d 크랙(Crack : 갈라진 바위 틈)에서 출발해 ‘시클 레지(Sickle Ledge·5.12a)’에 도달한다. 그 위쪽으로 넓은 크랙에 피톤 대신 난로 다리를 떼어다 박으며 올라 ‘스토브 레그즈 크랙’(Stove Legs Crack, 5.10c)이라고 명명된 피치가 150m 길이로 계속된다.


그 위쪽에 ‘돌트 타워 또는 엘캡 타워(Dolt Tower or El Cap Tower·5.9)’가 있다. 그 위쪽에 장화 모양의 바위 날개인 ‘부트 플레이크(Boot Flake)’ 옆(5.12a)을 통과하면 등로가 막혀, 좌측의 10m 떨어진 크랙으로 펜듈럼(pendulum)해서 건넌다. 이곳을 ‘킹 스윙(King Swing) 펜듈럼 피치’라 부르고, 건너편 크랙을 ‘그레이프 레이스 크랙(Grape Race Crack·5.10a)’이라 한다.


그 위쪽으로 난코스 바위 지붕 ‘그레이트 루프(Great Roof·5.13c)’가 나타난다. 노즈에서 길이가 가장 긴 이 피치는 크랙을 끼고 두 개의 암벽이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형성되어(코너 또는 다이헤드럴) 있는데, 크랙을 30m쯤 오르면 크랙이 우측으로 기울어지며 그 바깥쪽으로 부서지는 파도 모양으로 튀어나온 암벽이 바위 지붕을 이루고 있어서, 그레이트 루프라고 명명되었다. 그 바위 지붕 밑으로 좁은 크랙을 따라 트래버스해 바위지붕을 벗어나 다시 크랙을 오른다.


그 위쪽에 바위 날개인 ‘팬케이크 플레이크(Pancake Flake·5.11b)’에 이어 ‘캠프 파이브 레지(Camp Five Ledge·5.12d)’, ‘글로어링 스폿(Glowering Spot·5.10d)’, ‘캠프 식스 레지(Camp Six Ledge)’가 차례로 나타난다. 그 위쪽에 또 하나의 난코스 ‘체인징 코너스(Changing Corners·5.13d)’가 나오는데, 이 피치의 상부 3m는 홀드가 없는 가파른 슬랩이다. 그 위쪽으로 마지막 제33피치 ‘서미트 오버행(Summit Overhangs·5.12c)’이 있다.

엘캡의 살라테 월을 자유 등반하는 알렉스와 토마스.

1960년 로열 로빈스가 톰 프로스트, 조 피첸과 67개의 피톤을 설치하며 7일 만에 이 루트를 두 번째로 올랐다. 짐 브리드웰, 존 바카, 론 코크가 뒤를 이어 이 루트의 10m 너비의 펜듈럼 구간, 즉 ‘킹 스윙 펜듈럼 피치’와 ‘그레이트 루프, 그리고 벽 상부의 ‘체인징 코너스’ 구간 등을 제외하고, 루트 상에 크랙이 존재하는 모든 구간을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했다.


린 힐의 업적에 자극을 받고 살라테월 프리 클라이밍 시도


1981년 유명한 클라이머 레이 자딘(Ray Jardine : 프렌드라는 등반 장비 고안자)이 최초로 노즈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등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끌과 망치를 이용해 이 루트 상에 홀드가 없는 너비 10m의 펜듈럼 구간, 즉 킹 스윙 펜듈럼 피치에 핸드홀드(handhold, 손잡이)와 풋홀드(foothold, 발판)를 깎았는데, 이곳을 ‘자딘 트래버스(Jardine Traverse·5.11d)’라고 부른다. 이 작업 후에 사람들이 자연파괴자라고 맹비난을 퍼붓자 그는 노즈 자유 등반을 포기했다.


1993년 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이 동료 브루크와 교대하며 노즈 자유 등반에 성공했는데, 린 힐이 최대 난코스 구간 그레이트 루프와 체인징 코너스 구간을 비롯한 몇몇 난코스 구간들을 도맡아 돌파했다.


1994년에 린 힐은 23시간 만에 이 노즈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단독 등정했다. 그녀의 위업은 요세미티의 프리 클라이밍의 정수였다. 물론 ‘자딘 트래버스’가 없었다면 이 루트의 프리 클라이밍 등반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엘캡의 살라테 월은 1961년 로열 로빈스 일행이 남서벽에 480개의 피톤과 13개의 볼트를 설치하며 6일 만에 개척한 36피치의 루트이다. 이 루트의 최대 난코스 구간은 루트 상부의 3분의 1 구간인, 경사도 95도의 헤드월(Headwall, 난이도 5.13b)이다. 1988년 토드와 폴이 이 루트를 자유 등반했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그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탄로났다.


알렉스 후버는 린 힐의 업적에 자극을 받고 바로 이 루트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그는 먼저 이 루트의 프리클라이밍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캠프4(요세미티의 베이스캠프)에서 사귄 동료 고트프리드 월너와 인공보조 등반으로 이 루트의 정찰에 나서서, 계곡에서 700m 위쪽에 위치한 ‘지붕 밑 레지’라는 뜻의 ‘수 르 트와 레지’(Sous Le Toit ledge)까지 진출하고 비박했다.


이곳은 헤드월 초입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지붕에서 40m 아래쪽에 있는 평방 1m의 좁은 바위 레지(바위 선반)인데, 밤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낙비에 의해 급조된 폭포수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혹한에 떨며 잠을 설쳤다.


그들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등반을 속행해 살라테의 마지막 피치 헤드월을 돌파하고 정오에 등정했다. 그는 난코스 구간 헤드월을 제외하고 이 루트의 프리 클라이밍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1주일 후 200m의 고정자일, 비박장비, 5일치 식량 등 30kg 이상의 짐을 짊어지고 혼자 이스트 레지(East Ledges)를 이용해 엘캡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밤중에 정상의 작은 바위 지붕 밑 비박지에 도착하자마자 소낙비가 퍼부었다. 잠시 후 그 소낙비가 폭설로 변했다. 그는 운 좋게도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살라테의 난코스 헤드월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고 주마에 매달려 루트를 정찰하며 프리 클라이밍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길이 70m의 V자 형 크랙이 살라테의 최난 코스, 즉 ‘벽 안의 벽’ 헤드월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제1피치 55m는 팔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지점, 즉 안전한 확보지점에서 끝났고, 핸드잼(hand-jams, 손을 크랙에 번갈아 넣으며 등반함)으로 등반이 가능했다. 제2 피치는 손가락 굵기의 크랙으로 시작되어 두 번째 확보 지점 위쪽에서, 그 크랙이 사라져 버려 그 다음부터는 홀드가 없는 벽에 붙어 등반해야 할 최대 난코스 구간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정찰을 마치고 눈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급히 계곡 밑으로 하산했다.


1주일 후 그는 텐트를 소지하고 엘캡 정상에 다시 올라갔다. 요세미티 베테랑 클라이머 채프만이 함께 정상으로 올라와 그를 확보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그들은 헤드월 하단까지 5피치를 자일 하강했다. 그는 채프만의 확보를 받으며 헤드월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길이 70m의 크랙을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정신을 다음번의 핸드잼, 다음번의 홀드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모든 일은 잊은 채 등반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는 핸드잼으로 등반해 확보지점에서 3m 위쪽에 마지막 확보물 너트를 설치하고 난이도 5.13b급의 제1피치 55m를 돌파했다. 아직도 올라야 할 루트가 20m 더 남아 있었다. 제2피치는 손가락 굵기의 크랙이 도중에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려 그는 마지막 확보물에서 10m 위쪽으로 아무런 확보도 받지 못하고 등반했다. 그는 오직 고집만으로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절벽을 긁다시피 암벽의 손톱 홀드에 의지해 어렵사리 등반을 속행해, 등반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 채프만과 캔맥주를 마시며 난코스 돌파를 자축했다.


며칠 뒤 알렉스는 하인츠 차크의 확보를 받으며 살라테 월 전 구간을 레드포인트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프 달러(Half Dollar)’를 지나 거대한 ‘매머드 테라스(Mammoth Terraces)’에 올랐다. 그는 확보도 받을 수 없는 길이 30m의 침니, 즉 전설적인 할로 플레이크(Hollow Flake·5.12a)를 어렵사리 돌파했다.


살라테 월 루트의 3분의 2 지점에 암탑 엘캡 스파이어(El Cap Spire)가 위치하고, 그 아래쪽에 ‘이어(Ear)’가 있다. ‘이어’와 엘캡 스파이어 사이에 최대 난코스 구간, 즉 프리 클라이밍이 불가능한 기나긴 다이히드럴(Dihedral)이 존재한다. 그는 이 난코스의 초입에 도달한 후 다이히드럴을 피해 좌측으로 6m 우회하고 높이 50m의 크랙(5.11d)을 등로로 선택했다. 몸통 전부를 집어넣기에는 너무 비좁고, 팔 다리를 집어넣기에는 너무 넓어 등반이 가장 까다로운 구간이었다. 게다가 어떤 확보물도 설치가 불가능했다.


그는 상상 속의 확보물에 의존하며 40m를 올랐다. 확보용 로프는 정신적 지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높이 오를수록 추락의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그는 확보도 받지 못한 채 마침내 이 피치(Pitch)를 어렵사리 돌파했다. 그 피치의 등반은 1cm, 1cm 전진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듯했고, 하나의 ‘공포 쇼(horror-show)’를 방불케 했다.


그는 오후 6시에 녹초가 된 몸으로 엘캡 스파이어에 도달했다. 5피치 위쪽에 그들의 비박장소 ‘블록(Block)’이 바라보였다. 그는 또 하나의 어려운 피치(난이도 5.12d)를 등반할 때 세 번씩이나 추락을 경험하고 어둠 속에서 블록에 도달해 동료와 비박했다. 

1 카라코룸 오거 남동 버트레스, ‘오거의 노즈’라 불리는 루트다. 2 엘니뇨의 블랙 다이히드럴을 자유 등반하는 알렉스.

다음날 정오에 그들은 10피치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전에 루트를 정찰하며 비박한 경험이 있는 수 르 트와 레지(Sous le Toit)를 지나 난이도 5. 12d급의 루트를 돌파하고, 이미 프리 클라이밍으로 돌파한 경험이 있는 ‘헤드월’ 밑에 도달했다. 그는 난이도 5.13b급의 헤드월을 무사히 돌파하고 드디어 살라테를 레드포인트로 초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모든 분야에는 발전이 있기 마련이어서 알렉스의 위업이 달성된 후, 일본 클라이머 유지 히라야마는 살라테의 헤드월까지는 온사이트(On sight, 루트에 관한 사전 정보 없이 자유 등반함)로, 헤드월은 레드포인트(루트를 정찰하고 프리로 등반함)로 올라 38시간 만에 정상을 밟았다. 알렉스의 형 토마스도 다음해 살라테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등정했다.


1998년 후버 형제는 살라테의 최대 난코스, 헤드월 대신 좌측의 변형 루트, ‘프리 라이더(Free-rider·5.11d)’로 15시간 23분 만에 살라테 월을 레드포인트로 재등했다. 2002년 콜드웰은 19시간 만에 살라테를 레드포인트로 단독 등정했고, 일본 클라이머 히라야마는 13시간 만에 레드포인트로 오르는 발전이 있었다.

1997년, 2년 전 정상 600m 직전에 포기한 라톡 Ⅱ 재도전에 성공


1995년 알렉스는 5명의 동료들과 카라코룸의 중부지역에 위치한 라톡 Ⅱ (7,108m : 1977년 이탈리아 대가 남릉으로 초등)의 수직벽인 서벽 등반을 시도했다. 그러나 등로인 서벽의 쿨와르에서 낙석이 너무 심해 그들은 빙벽 위에서 시작되는 북서릉으로 등로를 변경했다.


고지대에서는 일교차가 너무 심해서 밤에는 극지대의 혹한에 떨고 낮에는 열대의 복사열에 시달렸다. 그들은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을 시작했다. 텐트 없이 하늘을 지붕 삼아 한데서 잠드는 일은 많은 클라이머들의 낭만적인 꿈이지만, 6,500m 고도에서는 신속한 등반을 위한 불가피한 고통의 선택이었다. 이 가파른 능선에서는 설동을 팔 충분한 적설(積雪)도 없었다.


그들은 빙설벽을 오르고 50m의 오버행 암벽 밑에 도달했다. 침니 안쪽에 사람 몸통이 들어가고도 여분이 남는 넓은 크랙이 있었다. 알렉스가 이 크랙을 15m 자유 등반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조금씩 굼벵이처럼 전진하여 이 스텝(Step)을 돌파했다.

600m만 더 오르면 라톡 Ⅱ 정상이었다.


그들은 난이도 VI급의 길이 1km의 능선으로 서서히 등반을 속행했다. 능선 상의 6,600m 지점에서 오버행 벽을 지닌 필라(Pillar)가 그들의 길을 가로 막아 그들은 퇴각했다.

그들은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카라코룸의 원정에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오거 섬(Ogre Thumb·5,500m)과 슈팔당(Spaldang·5,590m)을 등정했다. 알렉스는 오거 섬 남서벽(26피치 VI~VII 높이 800m)의 15m 높이 볼트 사다리를 프리로 등반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인공보조로 등정했다(1997년 그는 변형 루트로 이곳을 프리도 돌파했음).


알렉스는 다른 뮌헨 팀의 폴케르, 슈피츠와 슈팔당의 1,000m 높이의 이스트 버트레스(East Buttress)를 등반했다. 그들은 하단에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중앙의 설릉을 오른 다음 5,000m 지점의 한데서 비박했다. 그들 앞에 ‘카라코룸의 살라테 월’이라고 부를 만한 높이 100m의 헤드월이 나타났다. 헤드월 한가운데로 핸드 크랙이 뻗어 있었다. 그들은 크랙을 오르고, 록벨트(rock belt)와 정상 빙원 그리고 가파른 빙벽을 오르고, 폴케르가 정상 부근 5m 높이의 볼더(boulder)를 돌파한 후,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후버 형제는 토니, 미국의 유명 클라이머 콘라드 앵커와 라톡Ⅱ 서벽에 재도전했다. 그들은 우준 브락(Uzun Brakk) 빙하상의 해발 4,4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이번에는 서벽의 쿨와르에 심설이 쌓여 있어서 낙석이 없었다. 쿨와르가 끝나는 6,000m 지점에서 높이 1,000m의 수직 화강암벽, 서벽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벽 밑에 전진 캠프를 구축했다.


6월 24일 토마스, 콘라드, 토니가 쿨와르의 5,600m 지점까지 진출해 바위 오버행 아래에 ‘발코니 캠프’를 구축했다. 기상변화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적설량이 1m를 넘는 폭설이 내렸다. 이후 그들은 쿨와르 속의 세락(serac·빙탑)을 ‘뚱보 숙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콘라드가 말했다.


“뚱보 숙녀와 죽음의 무도장에서 춤을 추는 꼴이군.”


콘라드와 알렉스는 30kg의 짐을 짊어지고 1m, 1m 고난의 전진을 계속해 발코니 캠프 옆에 또 하나의 텐트를 쳤다. 토니와 콘라드는 전진캠프(ABC)에서 발코니 캠프로 짐을 운반하고 토마스와 알렉스는 쿨와르 상부 6,000m 지점까지 경사도 55도의 빙벽에 고정 자일을 설치한 후, 빙벽을 깎아내고 텐트를 세웠다.


토니와 알렉스가 50개의 카라비너, 20개의 프렌드, 30개의 너트, 15개의 피톤, 6개의 스카이훅, 해머를 가지고 서벽의 암벽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첫 번째 바위 지붕을 넘고 2피치 루트를 개척한 후 어둠이 다가와 벽 밑으로 하산해 6,000m 지점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토니가 서벽의 바위 지붕, 난이도 A3 루트를 돌파했다. 다음 이틀간 토마스와 콘라드가 6,450m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악천후로 등반이 중단되었다가 7월 13일 토니와 알렉스가 다시 서벽에 붙었다. 알렉스는 바위 날개를 오르고 홀드가 없는 암벽에 도달했다. 그는 3mm의 바위 모서리를 해머로 더 깨내고 거기에 스카이훅(Skyhook)을 걸고 우측으로 트래버스해 스카이훅을 걸고 슬랩을 오르고 머리카락 굵기의 크랙을 10m 돌파했다. 그곳에 6m 높이의 바위 날개가 얼음층에 붙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알렉스는 두 팔에 바위 날개를 안고 함께 추락해 공중 비행을 하지 않기 위해, 스카이훅을 걸고 바위 날개 옆을 기어서 통과하며 공포심에 떨었다. 그들은 악전고투하며 2피치를 더 진출하고 일몰이 되어 하산했다.

린 힐이 엘캡의 노즈, 그레이트 루프를 벗어나 등반 중.

다음 이틀 동안 토마스와 콘라드가 루트를 개척했다. 토니와 알렉스는 등뼈가 휘어지도록 절벽으로 무거운 짐을 운반했다. 그들은 절벽에 제비집 같은 포타레지(Portaleges)를 설치하고 비박했다. 그들은 낮에는 등반이나 짐 운반으로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넓이 1㎡의 포타레지 안에 갇혀 지내자니, 마치 감옥에 갇힌 신세나 진배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었다.


7월 17일 그들은 서벽의 6,800m 지점을 돌파하고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벽 밑으로 하산해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7월 19일 자정 정상으로 출발했다. 4년 동안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새벽 4시에 그들은 수직 벽의 6,800m 지점에 도달했다. 200km 떨어진 낭가파르바트에서 거대한 폭풍이 형성되어 지평선에서 초단위로 번갯불의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등반이 매우 까다로운 빙설 혼합구간을 번개 같은 속도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크램폰을 부착하고 7,000m 부근의 베르글라(얇은 얼음층)가 덮인 2m 높이의 슬랩 밑에 섰다. 그 위쪽에서 쿨와르가 정상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드디어 작은 눈밭을 밟고 라톡 II의 서벽(7,108m)을 초등했다. 


수직고 900m의 엘캡 남동벽에 자유등반 루트 개척에 나서


1998년 3월 알렉스는 호르스트, 게오르크, 여성 산악인 바르바라와 세계 6위 고봉 초오유(8,201m)를 노멀 루트로 등정했다. 보통 암벽 클라이머들은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상실할까봐 염려되어 고산 등반을 꺼린다. 그러나 알렉스 일행은 설릉과 경사도 70도의 빙벽을 오르고 제2 캠프에 도달했다. 아직도 정상까지는 1,200m가 남아 있었다. 새벽 3시에 호르스트, 게오르크가 먼저 출발했다. 바르바라와 알렉스도 뒤따라 나섰다. 그들은 7,500m까지 오르고 휴식을 취한 다음 등정했다.


1998년까지 미국 요세미티 엘캡의 ‘서벽’, ‘살라테 월’, ‘노즈’, ‘이스트 버트레스’는 모두 프리 클라이밍으로 등정되었지만, 아직 엘캡의 남동벽에는 프리 클라이밍 루트가 개척되지 못했다. 남동벽의 ‘북아메리카 벽(38피치·A3/5.8)’은 1964년 로열 로빈스, 톰 프로스트, 척 프랫, 이본 취나드가 인공보조 등반으로 9일 만에 초등하여 오랫동안 세계에서 최고난도의 거벽 루트로 군림(君臨)했다.


‘꿈속의 바다(Sea of Dreams)’는 짐 브리드웰 일행이 인공보조로 초등한 루트인데, 이렇게 인공보조 루트 80여 개와 변형 루트가 개척된 마당에 이제 ‘노즈’, ‘살라테 월’에 이어 엘캡의 남동벽에 프리 클라이밍 루트가 등장해야 할 시점이 무르익었다.


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노즈 프리클라이밍 초등자)이 여러 차례 남동 벽에 프리 클라이밍 루트를 개척하려고 시도했으나, 벽 하단의 난코스에 프리 루트를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후버 형제가 남동벽에 프리 클라이밍 루트의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하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의 친구, 미국의 유명한 클라이머 콘라드 앵커(다음해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 조지 말로리 시신을 발견함)가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콘라드 자신이 남동벽 우측에서 프리 클라이밍 루트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엘캡에서 모든 클라이머들의 꿈과 욕망은 한 지점으로 귀착되는데, 그곳은 엘캡의 정상이다. 그러나 후버 형제는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과연 남동벽에서 첫 번째 피치의 첫 번째 홀드부터 마지막 피치의 마지막 홀드까지 프리 클라이밍 루트가 연결될 수 있는 걸까?


그들은 2주일간 등로를 찾아내고 볼트로 필요한 확보지점을 구축하며 프리 클라이밍 준비를 했다. 그들은 ‘북아메리카 벽’의 출발점에서 우측으로 50m 떨어진 ‘뉴저지 턴파이크’ 루트의 출발점, 즉 작은 버트레스, ‘풋스툴(Footstool)’로 프리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그들은 홀드가 풍부한 홈통(Gloove)으로 50m를 오르고 풋스툴 꼭대기에 도달했다. 위쪽으로 암벽이 가팔라지며 프리 클라이밍 루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 때 좌측의 황금색 화강암벽 사이로 섬록암 암맥인 블랙 다이크(Black Dike)가 형성되어 프리 클라이밍 루트가 열렸다. 등로가 다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너비 2mm, 길이 20m의 바위 모서리가 등로 역할을 대신했고, 이어서 난코스로 880m를 오르자 ‘콘티넨탈 드리프트’의 최대 난코스 ‘갈라파고스(Galapagos)’까지 연결되었다.


그들은 등반을 속행해 다시 ‘뉴저지 턴파이크’ 루트로 회귀했는데, 이 루트를 이용해 벽 하단 3분의 1 구간을 돌파할 수 있었다. 계곡 밑에서 500m 위쪽 지점에 위치한 비박 장소인 ‘빅 서(Big Sur) 레지’까지는 루트가 무난했다. 그들은 저녁 때 그곳에 도착해 1㎡ 넓이의 레지에 포타레지(Portaledge, 이동식 텐트)를 설치하고 비박했다. 제비들이 지저귀며 계속 노래를 불러댔고, 매들이 사냥감을 찾아 공중 곡예를 벌였다.


다음날 아침 루트를 정찰해 보니 위쪽 ‘블랙 다이히드럴(Black Dihedral)’에 이르려면 장애물, 즉 두 개의 펜듈럼 트래버스 구간을 돌파해야 했다. 첫 번째 트래버스에서 이럭저럭 애를 써서 프리 클라이밍 루트를 찾아냈다. 그들은 먼저 3m를 트래버스해 아주 얇은 바위 날개에 도달했다. 그들이 그 바위 날개를 두드리자 속이 텅 비어 있는 듯 소리가 울렸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무너지지는 않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그들은 위쪽 두 번째 트래버스 구간에 도달해 절망했다. 그곳은 크랙도 없고 홀드도 없는 좌측의 바위 슬랩을 대각선 방향으로 8m 하강해야 했는데, 그 아래쪽에 사람이 손으로 암벽을 잡지 않고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 즉 안전한 확보지점이 있었다. 알렉스가 스탠스 위쪽에 그날의 6번째 확보용 볼트를 설치하고 비박했다.

1 엘캡 가운데 돌출부가 노즈, 좌측이 남서벽. 우측이 남동벽. 2 독일의 ‘침묵의 끝’(높이 350m) 루트.

37피치 엘니뇨 개척 이틀 뒤 자유등반에도 성공


다음날 알렉스가 스탠스에 서서 1m 길이의 로프로 자신의 몸을 확보하고, 자신의 안전벨트에 15m 길이의 자일을 매달았다. 토마스는 이 자일에 하강 장비 그리그리(Gri-Gri)를 설치하고 자신의 몸을 그 자일로 묶었다. 알렉스는 초크(Chalk)를 바른 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고, ‘인간 앵커(Anchor, 고정 장치)’의 역할을 하면서 근육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과 연결된 토마스를 4m 아래쪽의 작은 레지까지 하강시켜 주었다.


알렉스는 힘이 벅차서 헐떡거리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고, 다시 자신의 손에 초크를 바르고 형에게 하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형은 다시 4m 아래까지 무사히 하강했다. 다른 클라이머들은 후버 형제의 이 인력(人力)에 의한 하강이 프리 클라이밍의 타당한 해결책이냐고 반문(反問)할지 모르지만, 그들로서는 불가피한 조처였다. 그들은 한 팀을 구성해 그 구간을 프리로 하강한 것이다.


그들이 ‘로열 아치(Royal Arch)’라고 명명한 얕은 화강암 아치가 좌측으로 뻗어 경사도 90도의 블랙 다이히드럴 초입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먼저 ‘인듀런스 코너(Endurance Corner·5.12a)’를 돌파했다. 알렉스는 경사도 90도의 블랙 다이히드럴을 등반하며 이끼를 제거하고 최적의 너트 설치 장소를 찾아낸 후, 핑거 테이프(Finger tape)로 그곳들을 표시해 두었다.


이제 정상에 도달하는 데 최종 장애물은 거대한 바위 지붕, ‘블랙 케이브(Black Cave)’였다. 그들은 첫 번째 바위 지붕이 난코스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블랙 케이브의 첫 번째 바위 지붕 아래쪽 15m 지점에서 우측으로 우회했다.


그런데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어지는 여러 개의 바위 지붕들 밑에 위치한 20m 높이의 암벽에는 많은 자갈이 쌓여 있어서 낙석이 빈발했다. 그러나 이 루트는 ‘블랙 케이브’의 중앙에 위치한 안전한 확보지점으로 도달하는 최적의 루트였다. 이중(二重) 바위 지붕이 위치한 중앙으로 도달하기 위해 최종 6m의 심연(深淵) 위를 통과하는 구간(5.13b)이 난코스였다.


이곳에서는 확보장비가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속이 비어 있고, 덜거덕거리는 바위틈에 박아 넣은 프렌드(Friend, 암벽등반 장비)는 알렉스의 공포심을 다소 진정시키는 역할만 했고, 구부러지고 녹슨 칼날 피톤은 그의 체중을 잡아주기는 하겠지만, 만약 그가 추락한다면 그의 추락 속도를 완화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알렉스가 바위지붕 가장자리에 도달해 한쪽 발을 그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잽싸게 다음 홀드를 움켜잡았다. 그가 톱으로 잘라낸 듯한 바위 지붕의 절벽 위로 3m 전진했다. 이제 1m만 더 오르면 확보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그가 바위지붕 너머로 사라졌다. 그 순간 확보를 하던 형 토마스는 동생 알렉스가 바위 지붕 위에 설치된 모든 확보물을 지퍼(Zipper)처럼 모두 벗겨내고 원을 그리며 허공으로 튕겨 나오느냐, 아니면 확보 지점에 무사히 도달했다고 기쁨의 함성을 질러대느냐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동생의 기쁨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34년 전 로열 로빈스 일행이 인공 보조 등반으로 ‘북아메리카 벽’을 초등할 때, 척 프라트(Chuck Pratt)가 돌파했던 그 스릴 만점의 바위지붕을 이번엔 알렉스가 프리로 돌파한 것이다.


그들은 3일간 ‘사이클롭 아이(Cyclop's Eye)’와 ‘헤드월’로 최상의 루트를 개척했다. 사이클롭 아이의 오버행은 좌측의 바위 오버행을 가르는 침니로 우회했다. 바위지붕 바로 밑에, 돌고래 머리처럼 생긴 암벽에 큰 접시모양의 바위 날개가 붙어 풋홀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이 풋홀드를 돌핀(Dolphin, 돌고래)이라 명명했다. 그들은 프리 클라이밍 준비를 하면서 2주일 만에 드디어 정상을 밟았다.

엘캡 살라테 월의 다이히드럴을 등반하는 알렉스와 토마스.


그들은 남동벽의 기존 루트, ‘콘티넨탈 드리프트’와 변형 루트, 그리고 ‘뉴저지 턴파이크’, ‘북아메리카 벽’의 여러 구간과 변형 루트들, ‘꿈속의 바다’ 두 피치를 연결하며, 모두 37피치의 루트를 개척하고 ‘엘니뇨(El Nino)’라 명명했다. 머리카락 굵기의 크랙 때문에 자유 등반이 불가능하면 여러 루트의 새로운 변형루트를 개척했다.


그들은 이틀간 휴식을 취하며 손의 작은 상처들을 치료하고 손가락 부기가 빠진 다음, 전(全) 루트의 프리 클라이밍에 나섰다. 그들은 루트 상의 ‘블랙 다이크(5.13b)’와 ‘미싱 링크(Missing Link, 5.12d)’는 별 탈 없이 올랐으나 갈라파고스는 세 군데 난코스(5.13c/X)가 있어서 이곳을 통과할 때 확보자 토마스가 수차례 추락을 겪으며 고전했다. 그들은 칼라버라스 레지(Calaveras Ledges)까지 진출하고 늦은 오후에 계곡 밑으로 자일 하강해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그들은 유마를 이용해 전날 도달했던 최고지점, 칼라버라스 레지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프리 클라이밍을 속행해 두 시간 만에 ‘빅 서 레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첫 번째 트래버스(난이도 5.13a)의 바위 날개를 무사히 지나, 두 번째 트래버스의 인력(人力) 하강을 마치고, 로열 아치(Royal Arch, 난이도 5.13b)와 인듀런스 코너(5.12a)를 돌파했다. 그들은 그날 블랙 다이히드럴(5.12c)까지 진출하고, 비박장소를 찾아낼 수 없어서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아래쪽 ‘빅 서 레지’까지 자일 하강해서 비박했다.


셋째날 그들은 최난코스, 즉 바위 지붕 블랙 케이브(5.13b)를 돌파했다. 이제 100m만 더 오르면 이 루트의 모든 난코스가 사라질 텐데, 등반에 몰두하느라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고속도로 사이클롭의 눈(5.12c)과 돌핀(Dolphin, 5.12b)을 통과했다. 다행히 가랑비가 그쳤다. 그들은 ‘아이스미르(Eismeer, 난이도 5.13a)’를 지나 엘니뇨의 프리 클라이밍 등정에 성공했다.


후에 영국의 10대 소년 홀딩과 하몬드는 ‘엘니뇨’ 재등에 나서서, 홀딩은 이 루트의 두 피치만 레드포인트(Redpoint)로 나머지는 온사이트(On sight)로 올랐다. 


알렉스는 오거 신 루트 등반 실패했으나 토마스는 라톡 IV 남봉 등정


카라코룸 중부의 오거(Ogre·7,285m, 사람 잡아 먹는 귀신)는 8,000m의 봉우리가 아니지만, 1977년 더그 스코트 대가 웨스트 콜과 웨스트 리지로 초등한 후, 1999년까지 22년간 15개의 등반대가 실패해 성공률이 아주 낮은 산이다. 1999년 알렉스 대는 오거의 낙석과 눈사태의 위험이 없는 직등루트 상의 사우스 버트레스(South Buttress, 높이 1,000m)에 도전했다. 15년 전 프랑스의 산악인 피네와 보퀘(Vauquet)가 그리고 1997년 독일의 얀과 그의 파트너가 ‘오거의 노즈(Nose)’라 불리는 이 버트레스를 돌파했는데 그들은 모두 악천후를 만나 등정에는 실패했다.


알렉스 대는 베이스캠프에서 30일의 허송세월을 보냈지만 청명한 날씨는 단 5일뿐이었고, 그것도 3일간 연속해서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사우스 버트레스 상의 6,5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8월 5일 눈보라와 강풍 속에서 등반을 포기했다. 토마스는 라톡 IV의 남봉 등정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