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여러분도 이런 사람을 아마 보았을 것이다. 정신력이니, 흐르는 느낌이니, 이완 상태 등에 관해서 항시 말하고 모든 걸 아는 듯이 말하는 어떤 사람을 거의 어떤 암벽에서나 볼 수 있다.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어느 때는 그들의 말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도 있다.
상당히 오래 동안 등반을 해왔다면, 보통 때와는 약간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아무 생각이 없이 완벽하게 하나하나의 동작을 해나가면서 홀드에서 홀드로 나아간다. 전에 여러 번 떨어지고만 그 크럭스도 꽤 쉽게 보였고 또 그 어려운 일련의 동작 순서가 (sequence) 쉽게 풀렸다. 혹은 뱃속 깊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었던, 그 듬성듬성하게 확보물이 설치된 그 빙벽 루트가 갑자기 톱로핑하는 두려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나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것인가? 이런 마음 상태와 쉬운 워밍업 루트에서 떨어지고 이미 입력 되어 있는 아주 간단한 '시퀀스'를 엉망으로 만들고 마는 마음의 상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두 가지 마음 상태의 주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망설임 또는 자기 자신을 흐르게 하지 못하는 문제인 것이다. 가령, 저쪽으로 다이노 동작을 하려고 하지만, 붙잡고 있는 홀드를 놓아 버릴 수가 없다. 몸을 끌어 올려 다음 홀드로 몸을 던지려고 하긴 하는데, 할 수가 없다. 옴짝 달싹 못하고 있다. 불안감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몸을 날릴 배짱이 생길 때까지 홀드에 매달린 채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만다. 그러나 몸을 날리더라도, 여전히 망설이고 위를 향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 홀드를 잡지 못한다. 문제는 마음이 꽉 막혀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의해 막혀버렸다. 알다시피, 어떤 행위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면, 대체로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자, 그 점은 알고 있으나, 어떻게 하면 내가 그저 과감히 행동하고 그것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생각의 완전한 중단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발적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어떤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어떤 홀드를 향해 몸을 날려야만 할 때, 그저 몸을 던진다. 동작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관한 생각을 중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행동한다.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버려 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흐름에 맡겨 버리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마음을 자동 운행 상태로 (autopilot) 두는 것과 같다. 실제로 우리는 항시 이런 식으로 하고 있지만, 아마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때와 똑 같다. 백일몽을 꾸느라고 바쁜 가운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집에 도착하게 되며 그 백일몽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정지 신호, 다른 차들, 또는 속도 제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사히 scathe 집에 도착했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단 어떤 일을 충분히 해왔고 또 그 방법을 배웠으면 자기 스스로 그것을 자동적으로 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 알란 와츠의 저서 'the Way of Zen'에 나온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지네는 꽤 행복했었다.
"어이 내 밥! 어느 발이 먼저 가?“ 라고
두꺼비가 농담하기 전까지는.
이 말이 지네의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워하며 도랑 속에 있었다.
달려가는 방법을 궁리하며.
The centipede was happy, quite,
Until a toad in fun
Said, “Prey, which leg goes after which?”
This worked his mind to such a pitch,
He lay distracted in a ditch,
Considering how to run.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매일 매 순간마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분석한다면, 자기 스스로 속박이 되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함이 없이 우리의 마음이 활동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또한 의식적인 생각이 개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이것을 완전하게 하게 된다. 자신의 팔과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고 요구 받았을 때와 같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의식적인 나의 자아가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 활동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매우 좋은 등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런 의식적인 통제 없이 그저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 이다. 물론 어떤 제약 범위를 감안한 가운데 자발적으로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어려운 일련의 동작 순서를 먼저 잘 생각해서 풀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시퀀스를 일단 푼 다음에는, 자신의 의식적인 생각은 그 홀드에 둠으로써 우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자발적으로 만들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쯤에서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 아무 방법이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알다시피, 이것은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렇게 애를 쓴다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고, 편안한 마음가짐은 (relaxing), 정말로 마음이 편안한 상태라면, 전혀 노력이 개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의지력을 많이 동원해도 완전한 이완 상태가 되기는 어렵다. 그저 긴장이 풀어지는 일이 생길 뿐이다. 자발적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자발적이 되려고 또는 자연스럽게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대단히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막히게 되고 만다.
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 이제는 노력하려고 하지 않겠는데, 그러면 과연 될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노력하지 않으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애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돌고 도는 쳇바퀴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때 알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신이 참으로 깨달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효과가 없을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 무서운 악순환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이 점을 이해할 때, 그 빙빙 돔이 끝난 것이다. 소위 ‘긍정적인 사고방식’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고 방법)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방법들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머리 속으로 유희했던 그 모든 어리석은 놀이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바로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왜냐 하면 이것이 자연스런 상태이고 자연스러워 지려는 노력을 전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이노(dyno) 동작을 하려고 동일한 홀드에서 여전히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면, 모든 나이키 광고에 나오는 “Just do it!" 이라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