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은 바위 천국이다. 능선마다 머리를 치켜세운 기암괴석은 충남과 전북을 위시한 중부권 클라이머들에게 메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새천년 리지는 용문골에서 시작, 신선바위까지 이어져 대둔산의 참모습을 감상하기에 제격인 리지다. 높이를 더할수록, 변하는 풍광은 마치 석림(石林)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한국 선수들 선전이 한창인 베이징 올림픽 중계방송에서서 어렵게 시선을 떼고 대둔산(大屯山, 877.7m)으로 향한다. 꾸물거리는 하늘은 금새라도 비를 뿌릴 듯하다.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 등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취재진 모두 우중 등반을 각오하고 나섰지만 서울등산학교 허욱 교장은 대둔산 산행이 비로 취소될까 봐 걱정이다.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은 한잔해야죠.”
3시간 남짓 달려 대둔산에 도착하니 대둔산산악구조대 이왕영 자문이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다.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은 한잔해야죠.”
일 년 만에 만난 이대장과 몇 순배 잔이 돌자 “후두두!” 소리와 함께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밤 사이 점점 심해져 내일 등반에 대한 걱정에 잠을 설친다.
“비가 그쳤어요. 빨리 등반준비 하시죠.” 잠을 깨우는 이왕영씨의 반가운 소리에 서둘러 장비를 챙긴다. 이른 아침 대둔산은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비는 꼬리를 감추었다.
어제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고 표지기를 따라 오른다.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 주변으로는 구름에 가려졌던 암봉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영지버섯이다! 임기자 내가 양보할 테니 버섯 따가지고 가서 원기 보충해야지.”
이왕영씨가 발견한 영지버섯 다섯 송이를 조심스럽게 따서 배낭에 넣자 “왜 혼자 버섯을 챙기느냐”는 불평이 쏟아지지만 못 들은 척하고 신선바위 초입으로 향한다. 남자는 건강식품 앞에서 냉정해지는 것 같다.
10분을 더 가자 전주와 대전 클라이머들의 암벽훈련장인 신선바위 옆으로 붉은 화살표와 함께 ‘새천년’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새천년 리지’는 이기열씨와 대전시산악연맹 산악구조대가 2000년 9월 중순경 개척한 코스다. 페이스, 크랙, 슬랩 등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이 암벽등반 기본교육 훈련장을 연상시키는 다섯 피치의 중급자 코스다. 루트 이름은 대전산악연맹 손중호 고문이 ‘새천년에는 더욱 열심히 등반하자’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아빠! 저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경사가 너무 급해요.”
서울등산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이건화(11세)군은 가파른 바위벽을 보고 벌써 걱정이다. “어렵지 않은 코스니 차근차근 오르면 된다”고 이군의 아버지 이현영(45세)씨가 아들을 안심시킨다. 암벽등반을 통해 부자지간의 정이 돈독해지는 것을 보니 모두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첫피치는 20미터 5.9급의 난이도다. 평소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지만 비 때문에 바위가 젖어있어 쉽지 않다. 발이 밀릴 때마다 다행히 양호한 홀드와 크랙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다. 크랙에 캠 5호를 설치하고 오르자 피치 종료지점인 소나무가 반긴다. 이곳까지는 출발지점 왼편으로 우회해서 도착할 수도 있다.
건화의 등반이 시작된다. 건화는 주위 우려와 달리 작은 고사리 손으로 홀드를 당차게 움켜주고 가볍게 등반을 마무리한다.
“잘하네! 근데 왜 엄살 부렸어.” 꼬마 제자의 등반이 흐뭇했는지 허욱 교장은 한마디 건넨다.
첫마디 등반을 마치자 15미터 하강이 기다리고 있다. 건너편으로는 거대한 벽이 펼쳐진다. 새천년 리지 가장 어려운 5.10a급, 페이스 등반이 필요한 곳이다.
다음 피치 등반에 나선다. 두번째와 세번째 볼트 사이 턱을 넘어설 때 미묘한 밸런스 감각이 필요하다. 다행히 바람에 바위가 말라서 안정된 스테밍자세로 오른다. 네번째 볼트를 지난 후 크랙에 캠 3호를 하나 설치한다. 이곳부터는 선등자의 등반모습이 보이지 않아 확보자가 줄 처리에 신경을 써야한다.
40미터를 올라 등반을 마치자 그동안 답답하던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고개를 치켜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마치 중국의 석림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호남의 금강산이란 말이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작은 금강산을 오른 기분입니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과 같이 중부권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클라이머들에게 큰 행복입니다.”
이우일(55세)씨는 대둔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는지 연방 감탄사를 터트린다.
3피치 출발 지점은 5.10급 직상 크랙이다. 레이백 자세로 올라야 하는 데 상당한 완력이 필요하다. 왼손으로 크랙을 잡고 몸을 최대한 우측으로 이동해 균형을 잡고 오른다. 캠 4호를 설치하고 위를 보니 페이스 형태의 직상 크랙이 기다리고 있다.
크랙과 슬랩이 혼합된 코스라 등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이곳에서 신선바위 초입으로 하강할 수 있다. 새천년 리지에서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곳이다.
“매년 구조대원들이 루트 보수작업을 하기 때문에 대둔산은 리지등반 사고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대둔산에서의 등반사고 예방을 위해 대둔산산악구조대는 확보물 교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천년 리지 역시 올해 초 대전산악구조대원들과 함께 대대적인 루트 보수작업을 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대둔산이 안전한 등반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기로 한다. 도란도란 둘러앉아 나누는 등반에 관한 이야기가 정겹다.
리지등반은 수직의 오름짓이 아니다. 위로 오르는 등반인 암벽등반과 달리 리지등반은 수직과 수평 이동을 함께하는 등반이다. 그래서 오름짓의 여유로움과 등반자간의 소통이 암벽등반 보다 자유롭다.
4피치는 5.9급의 쉬운 슬랩이다. 안전을 위해 캠 하나를 설치하고 오르자 좋은 테라스에 도착한다. 이제 정상이 코앞이다.
바로 마지막피치 등반에 나선다. 첫 볼트까지가 약간 오버행이라 힘이 필요했지만, 홀드가 좋아 쉽게 넘어선다. 하늘과 닿을 듯한 날등을 타고 오르자 마당만한 반석이 반기는 신선바위 정상이다.
조망이 거칠 것이 없다. 한눈에 들어오는 용문골이 더위에 지친 일행 모두에게 청량감을 선사한다.
“와! 마치 구름 속에 있는 도인이 된 기분이에요.” 건화는 이곳이 신선바위인줄 어떻게 알았는지 정상에 선 기분을 안성맞춤으로 표현한다.
각양각색 바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20미터 오버행 하강을 마친다.
“건화가 제일 고생했다. 내려가면 뭐 먹고 싶어? 교장선생님이 다 사줄께, 얼른 말해봐.”
허욱 교장의 질문에 이군은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한다.
“묵밥이 제일 먹고 싶어요.” 어제저녁 맛을 본 묵밥이 기억에 남았나 보다.
하산을 시작하자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다. 시원한 비를 맞으면서 즐겁게 하산하는 일행의 모습에 정겨움이 넘친다. 산은 세대를 떠나 사람을 하나로 묶는다.
글 |사람과산-임성묵 기자 사진|주민욱 기자 장비 협찬|마운틴하드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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