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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imbimg information/─ 등.반.가

히말라야가 최초로 허락한 사람들-에드먼드 힐러리 & 텐징 노르가이

by 공자 (공영효) 2013. 5. 30.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

두 사람의 등반가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섰다.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곳,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 에베레스트!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발길을 허락하지 않으며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에베레스트!

 

1920년 서양인이 최초로 등정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수많은 등반대원을

에베레스트에 보내 정상 정복에 공을 들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 까지 히말라야 산의 최 고도 등정 기록은 스위스 원정대의 8,610M 였다.

 

그렇게 인간의 도전을 거부하던 “히말라야”가 

1920년 첫 도전 이래 33년 만에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두 사람은 바로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 출신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다.

 

 

그들은 영국 원정대의 일원 이었으므로 그들의 업적과 영광은 당연히 대영 제국에 귀속되었으며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첫 등반의 주인공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화려한 영광의 주인공으로 조명을 한 몸에 받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와 헌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였고, 텐징에게는 영제국 메달을 수여했다. 

영국정부는 또한 텐징이 등정 성공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조지 메달을 수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주로 힐러리에게 쏟아졌고

텐징은 한낱 원정대의 등반 안내인겸 짐꾼 ‘세르파’ 로만 치부되었음도 사실이다.

 

 

 

힐러리와 텐징의 만남

영국은 여섯번의 도전과 실패 끝에 1953년 4월 26일 다시 일곱 번째로

존 헌트 대령이 이끄는 대규모 원정대를 에베레스트에 보내게 된다.

이 등반대에 뉴질랜드 출신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있었다.

 

힐러리는 원정대의 고산 등반대원 10명중 한 명 이었으며

텐징은 21세이던 1935년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기 위해 최초등정이후 각국 원정대와

여섯 번이나 동행 등반한바 있으며

1952년 스위스 원정대와 함께 8,610미터 고지까지 올랐었던 베테랑 셰르파였다.

 

그 당시로선 인간이 오른 에베레스트의 최 고도 등정 기록이었으며

텐징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셰르파 역할뿐 아니라, 완전한 등반 능력을 갖춘 산악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여기서 잠깐,

그 당시 보급품이나 장비 운송은 어땠을까?

요즘은 자동차나 비행기로 모든 물품을 운송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카투만두 까지만 보급품이 배달되고 그곳에서부터 약289 km의 거리를 2~3백 명의 짐꾼들이

짐을 지고 걸어서 히말라야의 험하고 가파른 산과 강을 건너 히말라야 베이스캠프 까지 날랐다고 한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면 그중 뛰어난 등반경험과 체력을 갖춘 셰르파 3명만이

약 340kg이나 되는 필수 장비를 공격 캠프까지 운반한다고 한다.

짐꾼 조직부터 통솔하고 최종 보급푼 운반까지 총괄 책임자가 바로 텐징이었다.

 

 

 

 

등반대는 산의 규칙에 따라 두팀으로 나누어 정상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며

그 첫 번째 팀은 톰 보딜런과, 찰스 에반스였다. 그러나 그 들의 첫 번째 공략은 실패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힐러리와 텐징이 공략에 나섰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에베레스트는 죽음의 발톱을 곳곳에 숨기고 있는 곳이었다.

산으로 오르던 중 힐러리는 크레바스에 빠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힐러리를 지켜주던 생명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 줄을 움켜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텐징 노르가이였다.

 

텐징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지만 텐징은 로프을 놓지 않았고 끝까지 힐러리의 목숨을 구했다.

이런 일로 힐러리와 텐징은 등반 파트너로서 신뢰와 우정을 쌓으며 힘겨운 사투 끝에 힐러리와 텐징은

최종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리고1953년 5월 26일 오전 6시 30분경 2차 공격조로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산소통을 메고 최종 베이스캠프를 출발한지 2시간30분 후인 오전 9시,

8,760m의 남봉을 지나 마주하게 된 마지막 고비는 12m의 가파른 바위,  그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서

(이곳은 오늘날 '힐러리 계단' 이라 불리고 , 인도와 네팔에서는 '텐징의 등' 으로 불리는 곳이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힐러리는 네팔의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 정상 8,848m를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그들이 정상에 머문 시간은 약 15분가량 이었다.

 

그들은 1924년 올랐다고 알려진 멜로리 탐험대의 증거를 찾아 보았지만 발견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힐러리는 얼음도끼를 들고 있는 유명한 텐징의 포즈를 사진찍었다.

 

 

하지만 정작 힐러리 자신의 사진은 남기진 못했다. 이것은 이후 논란을 일으켰다.

과연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정상에 올랐는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안 찍었을까' 등이 논란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 논쟁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텐징이 카메라를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힐러리는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진등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으며,

텐징은 그 곳에 초콜렛을 남겼으며, 힐러리는 십자가를 남겼다고 한다.

 

에드먼드 힐러리경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정한 사람으로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초상이 실리기도 하였다.

살아 있는 인물로 지폐에 실린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 된 것이다.

 

 

 

 

 

굳은 신뢰와 배려가 만든 역사  

에베레스트에 첫 발을 디딘 사람은 힐러리 였지만 ,

사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먼저 도달한 사람을 텐징있였다.

 

체력이 떨어져 뒤쳐지게 된 힐러리는 텐징에게 먼저 정상에 올라 기다리라고 손짓했지만,

텐징은 바로 정상 앞에서 힐러리를 기다렸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의 영광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텐징을 그 곳에서 파트너를 기다렸고, 힐러리가 먼저 정상에 오르도록 양보하였으며 결국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텐징에게 야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텐징은 다른 세르파처럼 단지 짐을 나르고 안내만 해주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기를 끝없이 갈망했다.

 

그래서 기회가 올 때마다 기꺼이 자청했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났고 결국 일곱 번 째 힐러리와 함께  등정끝에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텐징은 개인의 욕심보다 팀워크를 중요시했다.

 

“동료들보다 앞서려고만 하거나, 동료들과 경쟁을 해서는 결코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을 오를 수가 없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팀워크를 발휘하여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움직여야만 한다.

물론 나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늘 꿈꿔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면 난 불평하기 보다는 남자로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산의 법칙이니까“ 라고 말했다.

 

 

 

신뢰와 우정.

역사상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최초의 인물은 에드워드 힐러리였지만 ,

그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빙벽을 오르고 추위와 싸우며 등반을 이끌었던

텐징 노르가이라는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텐징 노르가이의 노련한 안내와 도움이 없었다면 힐러리의 업적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세르파를 동료로서 신뢰하고 배려한 힐러리가 없었다면

텐징 역시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했던 꿈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등반 성공 후 힐러리는 온갖 위험을 함께 극복한 동반자 텐징에게 공을 돌리며

그를 영웅으로 대우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힐러리는 항상 "텐징과 나의 공동 등반"이라고 말했으며

결코 자신만의 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수 많은 언론 매체가 " 둘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는냐?" 캐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 텐징과 나는 한 팀으로 정상에 도착했다. 작업과 위험, 성공 모두는 우리 팀의 공유물이다.

팀 전체의 노력과 협동이 중요할 뿐 나머지는 무의미 하다." 말했다.

 

 

 

한편 텐징은 " 만약 정상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그런 부끄러움을 안고 살것"이라고 밝혀 힐러리가 먼저 올라갔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1986년 텐징이 숨을 거둔 뒤에야 힐러리는 "그가 마지막 몇 걸음을 앞에 두고 내게 영광을 양보했다."

고백하면서 그러니 "우리 둘이 함께 오른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텐징과 힐러리의 등반 50주년을 기념해

두 사람의 아들인 잠링과 피터가 에베레스트 동반 등정을 하기도 했으며

두 사람은 생을 마감하는 그때까지 오랜, 그리고 그리고 대를 이은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다.

 

힐러리와 텐징의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배려가 없었다면

어쩌면 인류는 산에 관한 위대한 역사를 쓰기 위해 좀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

 

 

 

Hillary, Sir Edmund Percival

1919년 7월 20일~ 2008년 1월 11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출생  등산가. 탐험가

 

1919년 오클랜드 인근 타우카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뉴질랜드 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뒤 등반 교육을 받고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걸었으며,

1953년 에베레스트(8848m) 등반에 나선 영국 원정대의 일원이 됐다.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가하여 셰르파 텐징과 함께 세계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는 한 해 전인 1952년에도 에베레스트에 올랐지만 실패했었다.

그때 그가 남긴 말이 회자되기도 했었다.

 '너는 첫 번에 나를 실패하게 만들었지만 다음 번에는 어림없다.'

 

1958년 초에는 남극횡단에도 성공하였으며, 네팔에서 학교와 병원을 짓는 데 힘썼다.

2008년 1월 11일 88세의 일기로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힐러리 히말라야에 묻히다!

네팔의 셰르파인 아파(49)는 2010년 5월초

에베레스트(현지명 초모랑마) 등반을 시작 중순에는 8,848m 정상에 올랐다.

 

아파의 등정은 네팔의 모든 셰르파와 산악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교외 드레이퍼에 이주해 살고 있지만

아파는 에베레스트 기슭에서 나고 자랐다.

 

12살 때부터 등반을 시작해 1989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처음으로 밟았다.

그 후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이 19번. 5월의 등반은 그의 20번째 도전이다.

 

셰르파들 가운데서도 베테랑 중 베테랑인 아파가 역사적인 기록을 세울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그에겐 이번 등정에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1953년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와 함께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최초로 오른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유해를 그곳에 뿌리고 오는 것이었다.

 

 

힐러리는 자서전에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 뼛가루를 에베레스트에 뿌려 달라”고 적었다. 

 

그의 유해 일부는 고향인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졌고, 나머지 일부를 이번에 아파가 가지고 올라갔다.

아파는 힐러리를 위해 산 꼭대기에서 불교식 천도재도 지내고 내려왔다. 

셰르파들의 삶에서는 힐러리의 유산은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산에 오르기 위해서만 네팔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힐러리의 네팔 사랑, 특히 셰르파 사랑은 각별했다.

그는 가난한 네팔에서도 특히 낙후된 미개발 지역에 사는 셰르파족을 위해

1962년 ‘히말라야 트러스트’를 만들었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거의 매년 히말라야를 찾아 셰르파족을 도왔다.

 평생에 걸쳐 120번 이상 네팔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셰르파족 거주지인 솔루쿰부에는 히말라야 트러스트가 지어 준 병원과 학교들이 있다.

에베레스트 주변 국립공원의 파괴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은 것도 히말라야 트러스트였다.

수많은 셰르파족 젊은이들이 이 기금에서 내주는 장학금으로 교육을 받았다.

 

생전의 힐러리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셰르파 아파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병원도 학교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1월 힐러리가 타계하자 네팔인들은 함께 애도했고,

에베레스트 근방에 있는 루클라 공항의 이름을 ‘힐러리-텐징 공항’으로 바꿨다.

 

저서로는 남극탐험의 동료인 V. 푹스와 공동 집필한 《남극횡단》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등이 있고

자서전으로 《모험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가 있다.

 

 

텐징 노르가이 Tenzing Norgay

 셰르파 텐징으로 자주 인용되는 "텐징 노르가이"

(네팔어:तेन्जिङ नोर्गे शेर्पा, 1914년 5월–1986년 5월 9일)는 네팔인 셰르파족 산악인이다.

 

1953년 5월 29일 그의 39번째 생일 즈음에,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함께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세계최초로 등정하였다.

텐징은 셰르파족이 초몰룽마라고 부르는 에베레스트 산 인근 네팔 쿰부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텐징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기억하는 날씨와 곡물들로 미루어 보아 5월 말쯤으로 여겨진다.

후에 텐징은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5월 29일을 생일로 정했다. 

 

텐징의 본명은 "남걀 왕디"였으나,

어린 시절 라마의 우두머리이자 유명한 융포사의 창설자인 응아왕 텐진 노르부의 충고에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

 

텐징 노르가이라는 이름은 "부유하고 행복한 신도"라는 뜻이다.

야크 목동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강 라 밍마이었고, 어머니의 이름은 독모 킨좀이었다.

 

텐징은 13명의 형제 중 11째였다.(형제 대부분은 유아시절에 사망하였음)

텐징은 소년시절에 카트만두로 두번이나 도망을 갔고, 19세의 나이에

인도 서벵골 주 다르질링의 투 송 부스티(Too Song Bhusti)에 위치한 셰르파족 집단에 정착하였다.

 

1930년대, 텐징은 영국원정대에 고지대 운반인으로서 참여하여

북부 티벳 쪽에서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세차례 시도하였으며 인도아대륙 다양한 지역의 등정에도 참가하였다.

 

1940년대 초반엔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 살았는데,

등정 중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난다 데비 이스트"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1947년, 텐징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했다.

얼 덴먼이라는 영국인과 앤지 다와 셰르파, 텐징은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위해

티벳지역에 불법적으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등정은 에베레스트 산 6,700m 지점에서 불어 온 강한 폭풍때문에 실패하였다.

덴먼은 등정을 포기하였고 세 명 모두 안전하게 귀환하였다.

 

1952년, 그는 레이몬드 램버트가 이끄는 스위스 원정대에 참가하였는데

원정대는 남부 네팔쪽에서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시도하였고, 텐징과 램버트는 8,599m의 등정기록을 세웠다.

 

셰르파는

히말라야 산악 안내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네팔과 중국령 티베트의 경계선 부근 고산지대에 사는 부족 이름이다.

 

‘셰르파(Sherpa)’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400년 전 무렵 티베트 쪽에서 넘어와 네팔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발 2000~4500m의 높은 지대에서 소의 일종인 야크와 감자를 키워 먹고 산다.

2001년 네팔 정부의 인구조사에서는 15만4622명의 셰르파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숫자는 점점 줄어 지금은 7만명 선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인도 다르질링과 칼림퐁 지역에도 셰르파족 일부가 산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에 강제 이주로 옮겨간 사람들이다.네팔의 셰르파족은 티베트계 방언을 쓴다.

주민 대부분이 라마불교를 믿지만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신성한 산’으로 섬기는 풍습이 있다.

 

이들이 산악 안내원이 된것은 1907년 영국 식민지 관리들이

히말라야 산들의 지형을 측정하기 위해 안내원으로 동원하면서부터다.

 

세계 산악사의 두 영웅

故 에드먼드 힐러리경과  故 텐징 노르가이 삼가 명복을 빕니다.

 

 

 

 

※P.S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요즘 세상에서 산 사나이들의 겸손한 마음과,

굳건한 신의, 그리고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교훈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세상에 미움도 다툼도 없을테지요?''' 

 

위 글의 내용은 웹상에서 발췌한 글 및 사진과, 도서등에 게재된 내용을 요점 정리 및 재구성하여 올린 글이므로 근본적으로 퍼온 글에 해당할수 있습니다.   참고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효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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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글쓴이 : 효석 원글보기